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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Jan 25. 2023

일상의 논어 <안연顔淵20>-문달聞達


子張問 士何如斯可謂之達矣 子曰 何哉 爾所謂達者 子張對曰 在邦必聞 在家必聞 子曰 是聞也 非達也 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

자장문 사하여사가위지달의 자왈 하재 이소위달자 자장대왈 재방필문 재가필문 자왈 시문야 비달야 부달야자 질직이호의 찰언이관색 여이하인 재방필달 재가필달 부문야자 색취인이행위 거지불의 재방필문 재가필문


-자장이 물었다. "선비가 어떠해야 통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요?" 공자가 말했다. "무엇이냐, 네가 통달이라고 하는 것이?" 자장이 대답했다. "나라 안에서도 반드시 알려지고 가문 안에서도 반드시 알려지는 것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이 명성이라는 것은 통달이 아니다. 무릇 통달이라는 것은 바탕이 곧아 의를 좋아하고, 말을 살펴 상태를 파악하며, 자기를 낮추어 타인을 헤아림으로써 나라 안에서도 반드시 명성을 날리고 가문 안에서도 반드시 명성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명성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인한 듯해도 행실이 어긋나는데 그렇게 살면서도 주저함이 없기에 나라 안에서도 반드시 알려지고 가문 안에서도 반드시 알려지는 것이다."          



자장이 문과 달을 혼동하기에 공자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聞은 '소리가 들리다'는 뜻이니 여기에서 '알려지다, 명성이 자자하다'의 개념이 파생됩니다. 한마디로 '유명해지다'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자장은 유명세를 한 사람의 실체로 착각하고 있는 셈입니다. 널리 이름이 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도통했기에 명성이 높은 것 아니겠냐는 인식입니다.


공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명성이란 허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지요.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도에 이르렀다고 하려면 먼저 '질직' 곧 마음의 본바탕이 발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의로움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즉, 마음을 꾸미는 자는 불의하기 쉽고 그 상태로는 절대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상대의 말을 통해서 그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를 알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관색觀色'은 단지 낯빛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장하고 있는지 꿰뚫어봄을 뜻합니다. 타인의 말에서 정황과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는 도에서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입니다.


'여이하인慮以下人'은 '자기를 낮춤으로써(이하以下) 타인을 헤아리는(여인慮人)'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사람의 생각은 타인에게로 흐르지 않지요. 언제나 타인의 높임을 바랄 뿐입니다.  


공자는 세태를 정확히 통찰하고 있습니다. 그의 통찰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지요.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글을 읽고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혜를 깨우치려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에게 배웠다는 기록을 남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공부가 사람을 통달하게 해줄까요? 글쎄요. 퍼스널 브랜딩이나 마케팅으로 일시적 유명세를 얻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뭔가를 아는 척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이비 교주들이 도통한 스승인양 코스프레하고 검사들이 정의의 사도인양 날뛰는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겠지요. 국민들이 타인의 말을 살펴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찰언이관색察言而觀色) 수준의 지성만 가져도 이런 세상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집단 지성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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