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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Feb 23. 2023

일상의 논어 <자로子路22>-불항기덕 혹승지수

不恆其德 或承之羞


子曰 南人有言曰 人而無恆 不可以作巫醫 善夫 不恆其德 或承之羞 子曰 不占而已矣

자왈 남인유언왈 인이무항 불가이작무의 선부 불항기덕 혹승지수 자왈 부점이이의


-공자가 말했다. "남방 사람의 말에 "사람이 한결같지 않으면 무의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좋은 말이다. '덕에 한결같지 않으면 부끄러운 짓을 연이어 하게 된다.'" 공자가 말했다. "점을 치지 않아도 된다."



<<주역>> 57괘 중풍손괘 구이 효사에 '사무史巫'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사史는 본래 가운데 중(中)과 점 주(丶)의 결합어로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관史官이 들고 다니던 주술 도구입니다. 주역에서는 점치는 사람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무巫는 굿하는 사람입니다. 위의 무의巫醫는 곧 무당으로, 여기에서는 점을 치고 굿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신에게 뜻을 묻고 비는 행위에는 매우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지요. 따라서 고대 사회에서 그것은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가진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일입니다. 무의를 무당과 의사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또한 '불가이작무의'를 '무의와 같은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도 될 수 없다'거나 '무의도 어쩔 수 없다'와 같이 풀이하면 본질과 어긋나고 맙니다. 기존의 관점들이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한결같지 않다는 것은 곧 신심이 없다는 것인데 신실하지 않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에 뜻을 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공자는 주역 32괘 뇌풍항괘의 구삼 효사를 인용합니다. (참고: https://brunch.co.kr/@ornard/506)


九三 不恒其德 或承之羞 貞吝

象曰 不恒其德 无所容也

구삼 불항기덕 혹승지수 정인

상왈 불항기덕 무소용야

-덕에 한결같지 않으면 부끄러운 짓을 연이어 하게 되니 이를 고수하면 궁색해질 것이다.  

-덕에 한결같지 않은 것은 용납될 바가 없는 것이다.


이라는 글자는 본시 달의 변화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상을 표현한 데서 유래합니다. '항구恒久'나 '항상恒常'과 같이 쓰이는 글자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주역의 가치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변可變 속에 불변不變의 이치가 있고, 불변不變 속에 가변可變의 이치가 있는 것이지요. 마치 밤하늘에 뜨는 달의 변화하는 매일의 형상과 변하지 않은 매월의 운동성처럼 말입니다. (오종호, 담백한 주역2(서울: 갑탁, 2022), 206.)


세태의 변화 속에서도 결코 바뀌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 법이지요. 공자는 지금 한결같은 덕德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덕을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도덕적ㆍ윤리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인격적 능력. /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 즉, 덕에 한결같지 않은 사람은 도덕적 윤리적인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인격적 능력이 부족한 것이요, 공정하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공감과 수용 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타인으로부터 받은 은혜나 도움을 배신하는 수준 낮은 인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고대 중국의 남방 이민족들은 그런 사람에게 무당의 권위를 주지 않은 것이지요. 오늘날 민주 국가의 국민들이라면 그런 자에게 권력을 위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질과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부끄러운 짓을 연이어 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명약관화한 일이므로 공자가 말한 대로 굳이 점을 쳐서 하늘에 뜻을 물을 일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식적인 일을 우리는 하지 않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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