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종호 Mar 10. 2023

일상의 논어 <헌문憲問5>-유덕자필유언有德者必有言

子曰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

자왈 유덕자필유언 유언자불필유덕 인자필유용 용자불필유인


-공자가 말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이 있지만, 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한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한 것은 아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이 있다'는 것은 '내면에 덕을 갖춘 이는 반드시 사람과 세상을 깨우칠 만한 말을 남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덕이 지연스레 말로 발현되는 개념이지요. 말에 꾸밈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번지르르한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덕이 높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근본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수단이지요. 그 과정에는 생각과 의견에 의도와 목적이 개입될 여지가 많습니다. 상대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얼마든지 화려하게 꾸며낼 수 있는 것이지요. 


특히 쌍방향 소통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때 말의 폐해가 심해집니다. 말하는 자가 유명세와 인기를 갖고 있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말할 권리란 곧 권력의 상징과 다름 없습니다. 말이라는 권력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에도 능숙하지요. 세상은 속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세상으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말을 욕망'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위정> 편 24장에서 공자는 '見義不爲 無勇也 견의불위 무용야  - 의를 보고도 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의는 실천하고 불의에는 가담하지 않을 때 용기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의義는 인仁의 하위 개념이니 인한 사람은 반드시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 반대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해서 반드시 인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내면이 공허할 때 사람은 나약해집니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겨 주기 쉽지요. 그렇기에 사이비 교주의 말을 추종하는 영혼 없는 노예가 되기도 하고 권력자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태연히 저지르고 헛소리를 지껄여도 좋다고 환호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지배할 수 있는 실력을 갖기 위해 오랜 시간 갖은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며 노력하는 사람과 돈을 좇는 사냥개처럼 살아가는 자 중에 누구의 내면이 충실할까요? 누가 결국 크게 성취하여 자신이 일군 부로 세상에 기여할 수 있을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논어 <헌문憲問4>-위언위행危言危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