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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Aug 04. 2023

일상의 논어<요왈堯曰3-최종회>-지명지예지언知命知禮知言

孔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공자왈 부지명 무이위군자야 부지예 무이립야 부지언 무이지인야


-공자가 말했다.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으며,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학이시습지'로 시작하는 논어는 '부지명'으로 끝납니다. 논어를 학(學)으로 시작해서 명(命)으로 끝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부지명'의 반대는 '지명'이요, 지명은 공자의 언어로 '지천명'입니다. 곧 명(命)은 천명(天命)입니다.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운명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늘은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는가?'와 같은 질문은 철학적 사유의 영역에 속합니다. 동시에 종교적 성격을 띠기도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개인 각자의 선택이지요. 어떤 선택도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천명하여 소명의 길을 걷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명을 모르고서는 군자가 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적 경험이 아니라 학문적 연구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학문에 매진할 수는 없지요. 그렇기에 저마다 아는 만큼, 삶에서 경험한 만큼 축적한 자신만의 판단 근거를 토대로 선택하게 될 뿐입니다. 다소 길지만 그 선택에 참고가 되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을 옮깁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류의 의기(意氣) 방자(放恣)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겸손한 사람이며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약한 사람은 대체로 선량한 사람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선량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선량하기 때문에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선량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선량하나 무력한 사람’이 대개는 부정적 의미로 쓰여집니다만 세상에는 반면(半面)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반면(半面)이란 모순의 반대 측면을 이루는 것으로 반면(半面)이면서 동시에 반면(反面)이기도 합니다.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일면입니다. 본질을 구성하는 일면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약함이 선량함의 반면(半面)일 수 있습니다. 본론에서 빗나간 이야기였습니다만 주역이 점치는 책이고 점치는 마음을 우리는 비과학적이라고 비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정직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9564)


공자는 '극기복례'할 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인(仁)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했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을 극복하고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사는 삶을 역설한 것입니다. 그때 인간으로서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이 입(立)의 의미입니다. 인간으로서 똑바로 설 때 비로소 인간의 존재 가치를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言)은 성인으로 지칭되는 과거 위대한 인간들의 말이자 그들이 남긴 글입니다. 곧 지혜의 텍스트입니다. 지혜를 키우는 말과 글을 공부하지 않고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각성과 타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혜를 갖게 되었을 때 타인의 말에서 진실과 거짓을, 진심과 가식을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통해 타인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의 운명을 추론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지혜는 통찰력을 길러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일면만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미성숙함과 교만함은 자신 역시 타인들의 가벼운 평가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 2021년 12월 1일 첫 글을 쓴 지 1년 9개월 만에 논어 텍스트 전체를 풀이한 '일상의 논어'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주역이나 도덕경 같이 깨달음을 주는 사유의 책과 달리 유가의 텍스트들은 실천을 위한 책입니다. 실천 방법을 조언하는 책에서 심오한 깨우침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책은 책의 목적에 맞게 읽어야 합니다. 


이미 기 출간된 논어 해설서들이 즐비함에도 굳이 저의 해설을 더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담백한 주역'을 쓸 때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완전 해석', '더 이상의 OO은 없다'는 식의 카피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디테일을 파고드는 것은 학자들의 숙명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학자든 독자든 원전 텍스트의 해석자와 해설자라는 입장에서는 동등합니다. 기존 해설들에서 저는 미진한 부분들을 보았습니다. 독자로 남는 대신 참여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기 책들이 놓치거나 간과한 대목을 바로잡거나 그 지점에 새로운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자부합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예들입니다. 


https://brunch.co.kr/@luckhumanwork/965


https://brunch.co.kr/@luckhumanwork/1015 


'일상의 논어'를 꾸준히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읽는 자들' 덕에 글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고, 글에 담긴 시간과 노력은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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