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깔깔깔깔. 맞아, 그랬지. 수리 얘 초등학생 때 가수 되겠다고 맨날 슈슈하고 춤추고 그랬지. 암만 봐도 몸친데 어찌나 대차게 엉덩이를 흔들어 대던지 아주 장관이었다니까? 그때 집 나갔던 이 아줌마 배꼽이 아직도 안 돌아왔지 뭐니?”
“치이, 제가 언제 엉덩이를 흔들었다고 그래요?”
“아닌가? 방뎅이였나? 깔깔깔.”
김선희 여사가 수리를 놀리며 장난을 치자 수리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박선미 여사가 미소를 머금고 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얘 진짜 그랬어요? 야, 너 어릴 때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다며?”
장난기가 발동한 영서도 수리 놀리기에 동참했다.
“어어? 오늘 공방 모녀께서 쌍으로 놀리시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무엄하도다! 여봐라, 당장 이 자들의 주리를 틀어라!”
“예이, 마마. 분부 받들겠나이다.”
슈슈가 간사한 내시의 목소리로 답하자 네 사람의 폭소가 터졌다.
“역시 슈슈네. 식충이 딸램들보다 백배는 낫다니까.”
김선희 여사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영서와 수리를 번갈아 바라보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두 딸이 혀를 길게 내밀었다.
“딸, 그래서 지금은 꿈이 뭔데?”
박선미 여사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작가겸 영화감독?”
“너 글 쓰는 거 싫어하잖아?”
“아, 지금부터 연습하면 되지?”
“그래 그래. 왜 그게 되고 싶은데?”
“저희 오늘 진짜 대박 영화 봤거든요.”
영서가 끼어들었다.
“아니, 그래서가 아니라 옛날부터 좋아했다구! 영화에서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도 가능하잖아. 나는 그게 젤루 좋았어. 판타지 영화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 그런 상상을 하면 기분이 막 좋아지더라구. 글고… 음… 아빠도 영화 보는 걸 참 좋아하기도 했고. 어른 되면 아빠에게 꼭 내 영화 보여 주겠다고 결심했었어. 근데 오늘 영화 보니까 정말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지더라.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많이 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이 수리마마께서 꼭 거장 반열에 올라 여러분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초대하도록 하겄슴당. 음하하하하하.”
“짝짝짝 박수.”
김선희 여사가 크게 손뼉을 치며 박선미 여사와 영서의 동참을 유도했다.
“멋진 꿈이다. 딸램 꼭 아카데미에 데려가 줘야 해? 엄만 그 날을 고대하고 있겠음.”
“응, 마미. 드림스 컴 츄루.”
수리가 손가락 두 개로 V자를 만들어 눈에 갖다 대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우리 영서 차례. 영서 꿈은 뭘까 엄청 궁금하다.”
박선미 여사가 숟가락을 들어 영서에게 건네며 물었다. 영서는 마이크처럼 숫가락을 입에 댔다.
“흠흠. 저는 사실 꿈에 대해 별로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냥 휴일마다 엄마 일 돕다 보니까 공예가 참 재밌더라구요. 엄마 닮아서 그런지 저에게도 손재주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구요. 그래서 미술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는데, 오늘 수리 꿈 들어보니 제가 뭘 해야 할지 알겠어요. 이수리, 나 결심했다. 니 모든 영화의 미술감독은 내 자리다. 계약서 쓰자.”
“와, 정말? 완전 좋아. 수리!”
“영서!”
“크로스!”
수리와 영서가 오른팔을 길게 뻗어 공중에서 X자를 만들며 좋아했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박선미 여사와 김선희 여사가 흐뭇한 얼굴로 건배했다.
“좋은 날이네, 박여사. 덕분에 우리 딸들 꿈이 뭔지도 알게 되었고. 생일 축하해. 우리 건강하자.”
“고마워, 김여사. 우리 썬시스터즈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우리도 잼나게 살자.”
두 여사는 잔을 기울여 쨍 소리 나게 다시 한 번 건배했다.
“두 분만 하지 마시고 저희도 끼워 주세요. 자, 다같이 건배!”
영서의 말에 수리도 잔을 들었다. 네 사람은 유쾌하게 웃으며 건배했다.
“아아, 동네 사람들. 잠시 공지사항이 있겠습니다. 이제 다음 순서는 저 슈슈가 준비한 특별 선물 개봉으로 이어지겠습니다.”
네 사람이 잔을 내려놓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슈슈가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고 나서 말했다.
“뭐야, 너 진짜였어?”
수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러엄. 이 슈슈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어? 자, 지금부터 선물 오픈합니다. 조명 꺼집니다. 거실 방향으로 시선을 모아 주세요. 레디, 액션!”
실내의 모든 전등이 꺼지자 슈슈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나와 거실 중앙을 향해 모였다. 잔잔한 음악도 흐르기 시작했다.
“아, 아빠다!”
빛의 끝에서 나타난 홀로그램은 수리 아빠였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영상을 응시했다. 박선미 여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안녕, 선미야. 안녕, 우리 딸 수리. 조금 놀랐지? 오늘 기운이 좀 나서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준비했어. 슈슈, 고마워.”
슈슈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안 수리 아빠는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홀로 있는 아빠의 적적함을 달래고 비상 상황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슈슈를 집에 들인 것이었다.
홀로그램 속 수리 아빠의 모습은 몹시 수척했다. 박선미 여사와 수리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김선희 여사와 영서의 눈동자도 촉촉히 젖고 있었다.
“선미야, 괜히 나 만나서 고생하게 해서 미안해. 나 정말 당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됐네? 나처럼 건강했던 사람이 아플 줄 누가 알았을까? 혼자 남겨두고 떠나서 정말 너무 미안하다. 외롭게 하기 싫었는데, 평생 옆에서 당신 웃게 해주고 싶었는데. 하아, 참.”
수리 아빠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수리 아빠는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그는 옷소매로 연신 얼굴을 닦았다.
“당신 또 울지? 하여간 이 울보.”
“흐으으으흑.”
두 손도 박선미 여사의 통곡을 막지 못했다. 김선희 여사가 박선미 여사의 등을 어루만졌다.
“수리야. 우리 수리 이제 고등학생이지? 많이 컸겠구나. 좋은 아빠가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해. 맨날 아픈 모습만 보여서 마음이 많이 아팠단다.”
“아냐, 아빠. 미안해 하지마.”
영서가 수리의 손을 꼭 쥐며 티슈를 들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빠는 우리 수리가 아빠 없어도 엄마한테 잘하고 공부도 운동도 다 열심히 할 거라고 생각해. 우리 수리 영화감독 되는 게 꿈이라고 했지? 너한테 참 잘 어울려. 수리 넌 정말 멋진 영화 많이 만들 거야. 미안 잠깐만.”
수리 아빠의 모습이 잠시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슈슈가 음악의 볼륨을 올렸다.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온 수리 아빠의 손에 ‘4랑해 4랑해’라고 쓰인 종이가 들려 있었다. 볼륨이 다시 낮아졌다.
“선미야. 마흔네 번째 생일 정말 축하해. 언제나 행복해야 해. 건강 잘 챙기고. 그리고 나 많이 사랑해 줘서 정말 고마워. 앞으로는 나 그만 사랑하고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래. 나한테 준 사랑, 그거면 나 충분해. 당신은 더 큰 사랑 받으며 살아야 해. 수리야, 이제 고등학생 되었으니까 아빠 말 이해하지? 엄마도 엄마의 인생이 있단다. 이제 너는 너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될 거야. 엄마를 텅 빈 공간에 혼자 남겨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는 너의 시간을, 엄마는 엄마의 시간을, 아빠는 아빠의 시간을 충실히 행복하게 채우자. 아직 안 가 봐서 잘 모르겠지만 하늘나라에도 분명 새로운 인연들이 있을 거야. 아빠 절대 외롭게 있지 않을 거니까 선미 당신도 우리 수리도 외롭게 지내면 안돼. 알았지? 이제 진짜 작별할 시간이네. 슈슈도 많이 아껴 줘. 슈슈 덕분에 두 사람 걱정 덜 수 있었어. 이 선물도 슈슈 덕분에 가능했지. 고맙다, 슈슈.”
슈슈가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사랑하는 내 가족을 위해 못쓰는 글이지만 직접 노랫말을 만들고 슈슈와 함께 작곡해 봤다. 내가 직접 부른 것처럼 슈슈가 도와줬어. 다시 한 번 고맙다, 슈슈. 그럼 모두들 안녕. 오래오래 행복해. 안녕!”
홀로그램 속 수리 아빠가 글썽이는 눈으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노래의 전주가 흐르자 그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화면 위로 세 식구가 함께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과 영상들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우리 함께였던 날들을 기억해
그날의 행복을 나는 잊지 못하지
눈부신 햇살과 따뜻한 눈동자
눈을 감아도 떠오르네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나 멀리 떠난다 해도 잊지 않을게
해맑은 미소와 따뜻한 마음을
영원히 사랑해요 그대를
세상 일은 저마다 다 이유가 있어
나의 시간은 그저 여기까지 인 것뿐
슬퍼하지 말아요 눈물 짓지 말아요
돌아보지 마세요 앞만 보고 가세요
그대 등 뒤에 나 있을게요
활짝 웃고 있을게요.
그대의 행복 지켜 볼게요
아주 가끔
정말 가끔
눈 내리는 날이면
그때만 문득
기억해 주면 돼요
그러면 돼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안녕히
- 눈 내리는 날이면
사진과 영상을 배경으로 가사가 한 줄씩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노래가 끝나고 홀로그램마저 꺼지자 집 안은 어둠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박선미 여사와 수리의 낮은 울음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10초 정도 경과했을 때 슈슈는 주방의 조명을 켰다. 네 사람의 눈동자는 모두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