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주역 <2.중지곤괘重地坤卦>-육오

하늘의 뜻을 받아 펼치는 리더의 소임을 다하라.

by 오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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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五 黃裳 元吉

象曰 黃裳元吉 文在中也

육오 황상 원길

상왈 황상원길 문재중야


-황색 치마니 매우 길할 것이다.

-황색 치마가 매우 길한 것은 문文이 중中에 있기 때문이다.



'문재중야'는 일부러 저렇게 풀이했습니다. 쉬운 글자들로 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래에서 그 속뜻을 찬찬히 들여다보려는 것입니다.


육오는 양의 자리에 음이 있으니 실위했지만 득중했지요. 주역 대성괘의 오효는 임금의 자리입니다. 임금을 오늘날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용어로 바꾸면 리더가 됩니다. 대성괘의 괘상 자체가 오효를 리더로 보지 않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중국에서 황색은 임금을 상징하는 색이었습니다. 육오가 동하면 외괘가 감괘가 됩니다. 황색이 물처럼 흘러내리는 상입니다. 그 모습을 치마에 비유했습니다. 리더의 덕이 넓게 퍼져나가는 모습입니다. 지괘는 8괘 수지비괘가 됩니다. 물이 땅을 촉촉히 적시니 '우로지택雨露之澤'의 상입니다. 리더의 덕이 아래로 흐르는 것입니다.


황상에 대한 사유를 넓혀 보겠습니다. 만물은 땅이라는 터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땅은 무토戊土와 기토己土이지요. 무기토는 만물을 품고 기르며 수확하고 뭇 생명을 먹이는 순환 과정을 관장합니다. 무기토에 해당하는 색은 황색입니다. 곧 '황상'은 드넓은 대지입니다. 주의할 점은 토에서 중中의 속성만을 읽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위에 집착하면 중의 확장은 중용, 중도라는 틀에 갇혀 버리기 십상입니다. 토는 두터울 후(厚)의 속성이 기본입니다. 후덕厚德함입니다. 앞에서 중용의 의미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정치적 레토릭으로 흔히 사용되는 중도라는 단어에서 후덕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모든 것을 품는 토의 넉넉함 대신 이도저도 아닌 정치철학으로 여기저기 발을 걸치려는 얍삽함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가장 행복한 땅의 모습은 잘 익어 황금색으로 물든 채 수확을 기다리는 가을의 들녘일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풍년과 흉년도 임금의 덕의 관점에서 살폈습니다. 임금은 하늘의 명을 대리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니까요. 요순시대는 태평성대의 대명사였습니다. 격양가擊壤歌의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于我何有哉 일출이작 일입이식 착정이음 경전이식 제력우아하유재 /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쉰다네.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힘은 나에게 어떻게 있는 것인가?' 한마디로 임금의 정치가 무위無爲로 있는 것입니다. 인위적 권력 행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임금의 덕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노란 치마 같은 들녘은 곧 무위의 정치의 결과물입니다. 길하지 않을 수 없고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린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강화도에 유배된 채 낚시로 소일하던 왕족 원유가 자신을 찾아온 세자 이창에게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는 가르침을 주는 짧은 장면입니다. 이 말의 원전은 <<한서漢書>>의 <역이기전酈食其傳>이라고 합니다. '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 왕자이민위천 이민이식위천 / 왕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킹덤>에서 역병은 백성의 굶주림이 계기가 되어 창궐합니다. 그 굶주림의 근본적인 원인은 리더십의 부재에 있습니다. 코로나 시국에서 "정부는 무능하다, 정부는 한 일이 없다, 의료진의 헌신 덕분이다"와 같은 말을 쏟아냈던 자들은 리더십의 막대한 중요성을 알면서도 일부러 폄하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산 선생님의 통찰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중지곤괘의 "육오가 인군자리에 상응하기는 하지만 하늘이 왕王이고 땅은 신臣이기 때문에 곤坤 육오는 신하의 자리로 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대산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따라서 중지곤괘 육오의 점괘는 2인자를 의미합니다. 1인자의 자리를 넘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중천건괘의 구오인 비룡이 후회가 남을 항룡의 지위로 날아가면 안 되는 것처럼 중지곤괘의 육오 리더는 언제나 자신이 2인자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권력을 누리기 위해 자신을 신격화하는 독재자들의 말로가 좋을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하늘의 명을 따라야 하는 일시적인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구체적인 실체임을 고서古書들은 명백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숙지해야 할 것은 주역 텍스트가 수양과 윤리서의 성격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진정한 가치는 텍스트의 적확한 해석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점을 친다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강력한 실천적 사유의 단계로 진보합니다. 주역의 텍스트는 점을 친 각자의 질문에 따라 전혀 상이한 의미로 재해석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 주역의 강렬함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점의 과정은 물론 점의 속성 자체를 무시하거나 주역의 각 대성괘를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주역 공부를 통한 깊은 철학적 사유 능력의 배양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텍스트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새로운 사유를 더하며 수양하는 것만큼 보편적 점례에 대해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실사례를 통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텍스트의 생물성을 느낄 때 주역 공부의 참 가치를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역易은 텍스트 자체의 의미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문재중야'는 주로 '문채文彩가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와 같이 풀이됩니다. <계사전 하> 10장에 '물상잡 고왈문 物相雜 故曰文'이라고 했습니다. 대성괘를 보면 양효와 음효가 어우러져 복잡하게 서로 섞여 있는데 그 모양이 무늬(文彩)와 같지요. 따라서 '황색치마가 매우 길한 까닭은 음양의 이치가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효사들의 형식에 맞추기 위해 글자 하나가 생략된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문文을 천문天文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황상원길'한 까닭은 천문이 부합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문의 사전적 정의는 '우주와 천체의 온갖 현상과 그에 내재된 법칙성'입니다. 곧 하늘의 이치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이치가 땅의 의지와 일치한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대리하는 리더의 덕에 하늘이 은혜를 베푼 것과 같습니다. 리더의 덕이 아래로 노란 치마처럼 너울거리면 하늘은 그 덕을 가상하게 여겨 풍요로움을 내리는 것입니다.


<문언전>에 '황중통리 정위거체 黃中通理 正位居體'라고 했습니다. 황은 황상원길의 황이요, 중은 문재중야의 중입니다. '리더의 소임을 다할 때 하늘이 그에 부응해 준다는 이치에 통하면 바른 자리에 몸을 둘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가치, 진심 어린 실천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국민, 부하직원, 가족, 기타 여러 인간관계에 다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리더와 팔로워의 속성 둘 다 갖고 살아갑니다. 스스로 리더임을 자임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항상 자기 머리 위에 하늘이라는 구체적 존재들을 이고 있음을 안다면 자기의 리더성性을 강조하는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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