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힘, 힘의 사람

by 오종호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 서로 안면 있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한들, 마음 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 <<명심보감>> 교우편(交友篇)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는 책을 쓴 옥스퍼드 대학의 로빈 던바 교수에 따르면 한 인간이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상한은 150명 정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뇌의 한계가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영장류로부터 진화해 온 인간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뇌의 용량과 기능을 무한 증식할 수 있는 AI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노회찬 의원, 그리고 박원순 시장의 죽음의 방식을 보며 나는 알았다. 인간은 출발과 끝이 모두 혼자인 존재임을. 그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이야기를 써 나가지만, 결국 인간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자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개별적 인간이 자기 몸과 자기 뇌를 통해 겪는 신체적, 정신적 경험을 타인과 온전히 나눈다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느낄(feel) 뿐이다. 감정을 교류하고, 가치를 공유하며,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변한다. 우리가 한때 가졌던 대상에 대한 감정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화 또는 변질되며, 한때는 삶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던 가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것으로 옮겨간다. 공감대를 상실한 사람과 사람은 그렇게 멀어진다. 누구도 평생 동안 영혼과 영혼의 완벽한 합일을 이룰 수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인간은 진정한 동반자를 갈구한다. 사랑과 우정이 인간의 인생과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는 이유다. 여러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혹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불특정 다수와 쉽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드러낼 수 있는 상대의 수는 극소수다. 아니, 아예 전무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배우자 만큼은 자신의 영혼의 반려자라 여기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역사상 최고의 미드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는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의 본심을 아내에게 고백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가족을 위해 막나가기를 선택한 중년의 남자는 끝내 가족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했고, 자신이 아끼던 애증의 파트너로부터도 외면 당한다. 만일 당신이 그 스토리의 당사자라면,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막나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은행을 털까, 사기를 칠까, 강원랜드에 갈까, 온갖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혼이 맑고 순수한 사람이라면 평범한 환자들이 그러하듯 항암 치료를 받거나, 인생의 의미를 색다르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자연으로 돌아가 인생의 마지막을 조용히 정리하거나 할 것이다.


둘 중의 어떤 것이든 옳고 그름은 없다. 그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남아 있는 인생의 날을 계산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누군가의 곁에 있기를 바랄 수도,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할 수도 있다. 개인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 다르다. 마치 컴퓨터 언어에 의해 코딩된 프로그램처럼, 우리를 평생 우리 각자로서 존재하게 만들었던 에너지의 조합과 관계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자신다운 선택을 내릴 뿐이다.


관중과 포숙아, 백아와 종자기, 오성과 한음 같은 역사에 남는 인간 간의 사귐은 현실에 드물다. 그래서 이상적인 것이고, 그래서 인구에 회자된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고 생활하는 과정에서 그저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하다 필요시 단절하거나 재건하며 살아갈 따름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책 <<건전한 사회(The Same Society)>>에서 다음과 같이 현대 사회의 인간 관계를 통찰했다. '친구에 대한 현대인의 관계는 어떠한가? 만인은 만인의 상품인 것이다. 오늘날 인간 관계에서는 사랑이나 증오가 그리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상적인 우정, 그리고 피상적인 공정은 있지만 그 껍질 뒤에는 거리감과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다.' 1950년대의 미국 사회를 관찰하여 도출한 그의 통찰이 참으로 날카롭지 않은가? 작금의 시대에 고스란히 옮겨 놓아도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나를 보기 위해

가던 걸음을 돌려 먼 길을 거슬러 오는

사람을 가졌다는 건


나를 만나기 위해

저문 시간을 계산 없이 달려오는

한 사람을 갖고 있다는 건


슬픔의 끝에 놓여 있던

한 잔의 술을 비우고


돌아선 날의 보람, 펄럭이는 힘


- 힘 / 오종호



오래 전 한 사람을 생각하며 내가 쓴 시다. 발표하지 않은 많은 시들 가운데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다. 그 시절의 추억과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나를 알아 주는 사람, 내가 알아 주는 사람은 한 생의 빛나는 기억을 잊지 않고 서로의 품 안에 간직하는 이다. 계산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핑계 대지 않고 서로의 옆에 머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많을 수 있겠는가? 그 한 사람의 간절한 말과 바람과 사랑과 우정이 최후의 순간에 바로 곁에 있었다면 많은 사람의 그 최후의 순간들은 연장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이다. 모였다가 흩어지고, 절절했다가 덤덤해지는 것. 그럼에도 내가 먼저 나서서 누군가를 알아볼 수 있다면, 그런 안목과 지혜와 마음을 갖출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진실한 벗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에게 진실한 벗으로 있어 주는 것이다. 원래,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손해 보며 사는 것이다. 이해 받기를 바라지 않을 정도의 내공을 갖추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새벽 2시에 느닷없이 걸려 오는 전화에도 당신은 먼 길을 거슬러 그에게 달려가 줄 수 있는 사람인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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