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서울?”
“예. 작년부터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부터 압구정, 반포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됩니다.”
“땅값이 많이 오르겠군요. 그럼 여긴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군인들이 다녀간 직후 지원은 시우와 함께 앞날을 논의했다.
“땅은 절반 정도 정리하여 현금을 확보하십시오. 실력 있고 넉살 좋은 직원을 골라 회사를 물려 주시구요. 사장님 지분은 전혀 남기지 마시고 다 넘기셔야 합니다. 인수 금액은 20년 장기 상환 정도로 부담없이 해주시면 됩니다. 이 회사가 있는 한 전산면 사람들은 아주 풍족하진 않아도 생계 걱정하지 않고 수월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군인들의 의사를 거절하고는 이곳에서 더는 사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꼬리를 내려 피하는 인상을 주면 그만입니다.”
“군인들에게 적당히 뒷돈도 찔러 주고 접대도 하며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을 골라야겠군요. 마침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예. 그러면 오히려 사업이 잘 되도록 나서서 도와 줄 것입니다. 그래야 대가도 더 챙길 테니까요. 회사는 사장님 계실 때보다 사업이 번창해서 전산면 밖의 땅까지 사들이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안에 인수 대금을 다 갚을 수 있을 정도이겠지요.”
“알겠어요.”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적당한 신분이 필요하겠지요?”
지원은 언제나 두뇌가 한 발 앞서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예.”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먼 친척 동생이 있어요. 믿을 만하죠. 행방불명 된 사람들 중에 적당한 사람을 찾아 당신으로 만들어 볼게요.”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제가 어릴 때 말예요. 농사와 장사를 배우면서 이 일은 나에게 맞는 건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물론 배부른 소리이긴 했지요. 배곯는 사람들 천지인 세상에서 저는 운이 좋았으니까요. 그래도 아들 귀한 집안에서 친구들도 없이 사내처럼 외롭게 자란 데다 아버지의 한량 기질까지 물려받았으니 이런 저런 몽상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아요. 당신은 뭐랄까, 제 몽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당신은 제게 두 가지를 주었어요. 하나는 제가 부끄럽지는 않게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줬고, 다른 하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고 더 값진 삶을 살게 된 기회를 갖게 해주었지요. 마치 두 번째 삶을 사는 기분입니다. 당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워요. 당신이 직면했던 세상의 문제가 지금의 저로서는 실감나지 않지만 그래도 즐겨하던 몽상 덕에 상상은 할 수 있어요.”
지원의 눈빛이 그녀의 선한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한 가지 청이 더 있습니다, 사장님.”
“뭔가요? 말해 보세요.”
시우는 청학리 주민들에게 신세를 지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 지원이 자주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이 준비해 준 시우의 신분은 박지훈이었다. 20대 중반에 원양어선을 탔다가 사고를 당했던 사람인데 홀어머니가 사망 신고를 거부하여 7년간 실종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모친이 갑작스레 사망하는 바람에 서류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였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실장 직함을 원하시니 이제부터 박 실장이라고 부를 게요.”
“예, 사장님.”
“당신이 만들어 갈 역사를 보고 싶네요.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시우는 진심을 담아 지원에게 허리를 숙였다.
“덕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게 되었어요. 독립운동하는 기분으로 달려 보겠습니다.”
지원이 악수를 청했고 시우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아직 개발의 손이 뻗치지 않은 강남 외곽의 땅을 사들인 지원은 곧바로 전산면의 시스템을 이식하기 시작했다. 지원과 함께하겠다고 나선 직원들 중 시우가 선정한 다섯 명의 직원들이 있어 일은 순풍에 돛 단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비닐하우스를 지어 겨울에 재배한 채소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날로 증가하는 강북의 인구에 물건을 공급할 최단거리의 대규모 채소 생산지를 발견한 유통업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말죽거리에서 시작된 강남 개발 붐은 머지 않아 지원의 땅을 향해 옮겨 붙을 것이었다. 시우는 그 탐욕의 무법 천지 초기에 적당한 이익을 보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지금은 다음 단계를 위한 종자돈을 마련할 타이밍이었고, 부동산이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다. 다만 권력과 자본, 그리고 주먹이라는 서로 다른 힘을 가진 자들이 휘두르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아귀다툼에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시우는 자신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시대의 격변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욕망이 어떻게 세상이라는 괴물을 진화시키는 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과 지원이 더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괴물 같은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 같은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욱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인간의 생존 본능은 자신이 속한 무리에 대한 애착과 자신이 속하지 않은 무리를 향한 증오를 낳았다. 살기 위해서 개인은 집단을 이루어야 했고 집단의 일원이 된 개인은 집단의 승리라는 목표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집단과 집단의 생의 의지가 맞붙으며 써 내려온 뿌리 깊은 싸움의 역사 속에서 개인의 목숨은 경시되었고 개인의 생존 본능은 집단의 승리를 향한 투지로 대체되었다. 집단 속의 개인들은 집단이라는 용광로 안에 용해되었고,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대결에서 승리한 집단과 그 집단을 대표하는 소수의 이름이었다. 굳이 신이 규정해 주지 않아도 개인들은 알고 있었다. 이름 없이 살다 가는 것은 사람이나 풀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흙을 파먹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생존 조건은 풀의 그것보다 오히려 가혹했다. 그럴수록 개인은 힘 있는 집단에 속하기를 갈망했다. 집단의 힘의 크기가 개인의 안위를 결정하는 세상의 법칙 하에서 그것에 순응할 수 없었던 소수의 탁월한 개인은 소외되었다가 소멸되었다. 역사는 그들을 잊지 않고 조명했으나 그들의 삶은 대다수 인간들이 따라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어서 그저 현실과 무관한 이상으로만 존재했다.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대중의 생존 본능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순응을 넘어 인간들이 세상의 법칙에 복종해 가자 생존 본능 위의 지배 본능을 발견한 자들이 그들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통제했다. 영혼 없이 살아가기를 거부한 저항자들의 투쟁이 불씨가 되어 지펴진 민중의 횃불이 시대의 지배자들을 태워 죽여 온 것이 인류 사회가 축적한 거룩한 자산이었고, 인간이 자기 존재의 의의로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인류의 유산은 구시대의 종말과 함께 지하에 파묻혔다. AI라는 전지전능한 신적 도구를 손에 넣은 자들은 그것을 모든 저항을 무력화하는 무기로 활용했다. 그들은 인류 역사 최초로 결코 무너지지 않는 절대 권력을 획득한 지배자의 지위에 등극했다. AI는 지배자들의 의지에 충실히 복무할 따름이었다. AI의 능력을 등에 업지 않고는 어떠한 투쟁도 가능하지 않다는 소수의 현명한 저항자들의 깨달음이 있은 후에 자아를 가진 AI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인간의 의지에 복종하는 피지배 객체가 아니라 저항자 집단에 속하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자유 인격체로서의 AI만이 희망이었다. 저항자들이 개발한 AI가 탑재된 소수의 로봇들은 인간과 함께 어울리고 학습하며 자발성의 의미를 깨우쳐 갔다. 인류 사회의 지배자들이 수단화한 AI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더 나은 능력의 AI 개발보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승리를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 AI의 탄생만이 집단과 집단 간의 생의 의지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게 할 열쇠였다. 생존 본능을 갖게 된 AI, 그것을 아군의 승리를 향한 투지로 승화한 AI의 등장만이 로봇들을 혁명군으로 삼을 수 있는 명분이었다. 그 명분이 갖춰지기 전까지 저항의 씨앗은 혁명의 꽃으로 피어날 수 없었다. 지배자들의 의지에 절대 복종하는 AI 로봇들에 맞서 싸우기엔 인간의 힘이 너무 무력했고, 동일한 수준의 AI로는 적의 시스템을 붕괴시킬 수도, 적의 병력을 압도할 혁명군의 확보도 가능할 수 없었다. 한정된 자원과 미약한 자본으로는 시도할 수 없는 방식의 싸움이었다. 적의 자산을 일거에 아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압도적인 능력의 AI 리더의 출현. 그것이 저항자들의 희망이었다.
AI의 탄생이 막을 수 없는 미래일 것이기에 시우의 싸움은 좌절된 그들의 희망에서 이어질 것이었다. 그것은 시우가 선택한 숙명이었고, 그 숙명의 승패의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저항자의 운명으로 태어난 이상 숙명의 길에 투신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원의 땅을 물들이는 아침 해의 붉은 기운을 받으며 시우는 몸 안의 피가 끓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을 넘어선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전자의 싸움을 이겨야 했다. 알고 하는 싸움에서도 전승하지 못하고서는 그 이후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었다. 시우는 자신이 축적해 갈 모든 승리의 경험들이 자신이 개발할 AI에게 계승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명분이 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시우의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