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이제부터는 한 동안 몸을 낮추고 숨어야 합니다. 흔적을 이어 붙이지 못하게 공백기를 만들어야 해요.”
“얼마나요?”
“10년 정도입니다.”
“그렇게나?”
지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시우를 쳐다보았다.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찾는다는 사람 역시 미래에서 온 것일 테죠?”
“예. 인상 착의가 제각각인 걸 보면 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여러 명일 수도 있구요.”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당신이 과거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 말예요.”
“그들이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 이유는 다음에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물론 일에는 언제든 변수가 발생할 수 있으니 그럴 경우 그에 맞춰 전략도 수정해야겠지요. 중요한 것은 제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과에 시간의 물리적 선후 관계가 무의미해진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입니다. 목표를 향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 말입니다. 사장님. 어느 날 갑자기 저에게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제가 떠나오기 전에 잘못되어도 제가 여기에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저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사장님입니다. 제가 없어지더라도 사장님께서 일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런 말 말아요. 당신은 괜찮을 겁니다.”
“앞으로의 10년은 단순한 휴식기나 도피기가 아닙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를 도울 우군들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그들이 일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한국 사회가 한동안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 것입니다. 80년대 중반에 큰 기회가 옵니다. 다음은 주식 시장입니다. 앞으로 주식 시장은 여러 번 우리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10년 후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극심한 혼란이라…… 박정희 독재가 무너지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또 쿠데타가 일어나는 건가요?”
“안타깝지만 그렇게 됩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습니다.”
시우는 지원의 혜안에 감탄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걸 우리가 막으면 안 되는 건가요?”
“저도 한때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만, 시련들을 극복하며 한국 사회는 분명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유산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음…….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우리의 목표에 집중하도록 하죠.”
“예, 고맙습니다, 사장님.”
지원이 자신을 믿어 보라며 매입한 땅은 시우의 마음에 쏙 들었다. 산능선에 둘러싸인 호수가 자아내는 호젓한 분위기는 북유럽의 시골 풍경을 닮아 있었다. 그곳에 3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동일한 모양의 두 채의 오두막이 지어져 있었고 건물 옆에 한 대씩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오두막은 실상 위장된 강철 소재의 건물이었다. 비상시 지원을 보호하려는 시우의 의견이 반영된 설계였다. 하지만 지원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두막 뒤로 50m 정도 떨어져 있는 숲 속에는 특전사 출신의 경호원들이 3교대로 근무하는 초소가 숨겨져 있었고, 하시라도 동원할 수 있는 단단한 군용 지프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음에 듭니다, 사장님.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다 당신 덕에 벌어 들인 돈의 힘 아니겠어요? 쓸 땐 제대로 써야죠. 지하 연구실도 당신이 그려 준 대로 만들기는 했는데 혹시라도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하세요. 앞으로 한 달 간은 업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대기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 가끔은 시간 내셔서 부모님들 뵙고 오세요.”
“그래요. 그 점은 너무 염려 말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각자의 거처를 둘러보고 난 뒤 둘은 저녁 거리를 들고 다시 모였다. 호수를 물들인 석양이 지원의 오두막 앞 테라스 안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연구실은 완벽합니다, 사장님. 연구에 필요한 원료들과 필요 장비를 만들 재료들도 잘 구비되었습니다. 구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일본 지인들 덕 좀 봤어요. 일본 본사의 국내 지사가 정식 수입한 것으로 처리했고, 대금 지불도 넉넉히 했습니다. 비자금 조성 건으로 골치가 아팠는데 마침 제 덕분에 해결되었다고 어찌나 좋아하던지.”
“다 사장님의 인덕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저를 너무 띄우시네요. 그 정도 하시고 일단 목 좀 축이시죠?”
지원이 얼음통에 담겨 있던 병맥주 두 병을 꺼내 뚜껑을 따서 시우에게 건넸고 둘은 병을 가볍게 부딪쳐 건배했다.
“당신이 말한 그 인공지능이라는 거, 왜 미래의 인간들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거죠?”
“탐욕 때문이지요. 돈과 권력.”
“물론 그렇겠지요. 그것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통제되지 않는 신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갈 정도로 어리석을 줄이야.”
“그 전부터 인간이 영혼을 상실해 가는 징후는 많았습니다. 장기 이식 기술이 생기자 불법 장기 매매가 횡행했고, 장기를 얻기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을 납치하여 죽이는 일도 많았지요. 인간은 끔찍한 생명쳅니다.”
“정말 끔찍하군요.”
“예. 저도 그 끔찍함에 일조한 셈이구요.”
“무슨 얘긴가요?”
“전에 하셨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들어 있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성공한 수단은 노화를 멈추는 데서 더 나아가 다시 젊어지게 만드는 물질의 개발이었습니다. 진작에 신약으로 완성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창업했다면 전세계에서 엄청난 규모의 투자가 밀려들었을 테고 투자자들도 저도 돈방석에 앉았겠지요. 하지만 제가 추구한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본 논리상 그런 식으로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돈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AI와 로봇 기술은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는커녕 대부분의 사람들을 빈곤에 빠뜨렸습니다. 임계점에 도달하자 순식간에 일자리들이 사라졌거든요. 인간의 노동력이 불필요해진 기업들은 인간들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기업들이 벌어들인 돈을 세금으로 거둔 정부 역시 복지에는 돈을 아꼈어요. 쓰레기 같은 정권이 등장하고 말았거든요. 저는 첨단 문명 사회에서 사람들이 겨우 굶주림을 면하는 수준의 삶을 사는 현실을 용납하기 힘들었습니다. 일단 인간의 노화를 멈추고 싶었어요. 그래야 버려진 인간들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다크웹, 이건 지난 번 설명 드렸던 인터넷의 음지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깊이 은밀히 작동하는 네트워크이지요. 번역하자면 심연망 정도가 적당하겠어요.
제 약은 3개월에 한 알만 복용하는 간편한 방식이었습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도록 저는 다크웹에서 그것을 아주 저렴하게 공급했지요. 사이트 이름도 라틴어로 ‘회춘’이라고 직관적으로 지었습니다. 아직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약이었으니 처음에는 당연히 팔리지 않았습니다. 가짜 약으로 돈 벌려는 양아치 정도로 취급 받았지요. 그래서 100명에게 6개월치를 무상으로 제공했어요. 일부러 50~60대의 중년만을 골라서요. 사람의 유전적 특질에 따라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제 약은 처음 복용하고 며칠 지나면 10년, 두 번째 복용하고 며칠 지나면 20년 젊어진 외모로 만들어 줍니다. 그보다 더 젊게 만드는 노년층 전용 약은 다른 버전으로 제조해야 해서 별도의 생산 설비를 갖출 여력이 생길 때까지 일단 뒤로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기마다 복용해야 그 외모가 유지되지요. 만일 중단하면 서서히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되고, 그런 식으로 하면 약을 먹어도 돌아갈 수 있는 생체 나이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기업에서 출시하면 떼돈을 벌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약이었지요.
제가 요구한 것은 간단했습니다. 복용 후기. 비포 앤 애프터를 보여 주는 사진이 있다면 훨씬 효과가 좋았겠지만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으니까요. 반신반의하면서도 구매자들이 늘면서 입소문이 퍼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앞다투어 주문을 하기 시작했지요. 다크웹에서 직접 돈을 받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건 위험했지요. 인터넷 유통업을 하는 똘똘한 친구에게 맡겼어요. 기술적으로 은밀한 방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팔고 싶었지만 그 당시 제겐 그들을 변별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과도기라고 생각했지요. 자력으로 창업할 수 있는 자본을 만들겠다는 단기적 목표가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판단이었지요.
기업들이 만드는 제품과 서비스의 소비자는 여전히 인간이었고 영원히 인간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을 알면서도 기업들과 정부는 빈곤층을 철저히 외면했고 오히려 키움으로써 제거해야 할 악으로 규정해갔지요. 그런 사회에서는 누구든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순간 인생도 끝나고 맙니다. 재기할 수단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음……”
“노화가 멈추는 순간 영원히 정치 무대에서 내려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정치인들이 겉으로는 저를 잡아야 한다고 부르짖었지만 시늉뿐이었습니다. 그들도 암암리에 제 약을 복용했다는 것을 그들의 변한 외모가 대신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근무하던 업계 선도 기업 이노큐라는 물론 다른 회사들에서도 다들 임상 실험 중이었으니 다크웹의 제가 없어지는 것은 그들에게 재앙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당연히 많은 적이 생겨 났습니다. 노화를 늦추는 화장품이나 건강 기능 식품을 만들던 많은 회사들이 망했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지구에서 없애 버려 인구를 조절하려고 했던 자들도 저를 증오했습니다. 제게 위험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랬겠지요.”
“우생학에 심취한 자들은 자기들 기준에 쓸모 없는 인간들이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먹고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어요. 그 사람들 때문에 지구가 꽉 차는 게 싫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제 약과 동일한 효능을 가진 카피약이라고 속여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망가뜨리는 일종의 마약들을 헐값으로 시장에 풀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그저 수수방관했지요. 세금을 내지 않는 존재들은 그들에게 무의미했으니까요. 사람들을 중독시켜 놓고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제 격리 치료가 그들이 사람들에게 내린 처벌이었어요. 처벌을 거부하고 몸을 피한 사람들은 로봇들에 의해 금방 체포되었습니다.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방법이 있어야 했지요. 수감시켜 놓고 식량을 소비시키는 것은 썩은 정치인들이 택하기 어려운 방식이었어요. 대상자들이 너무 많았고 땅과 식량은 부족했지요. 그때 그들이 생각해 낸 게 바로 시간 시장입니다.”
“시간 시장?”
“예. 주식 시장에서 돈 대신 시간을 투자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돈 대신 시간이라.”
지원이 시우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시간을 투자하게 한 것인데, 그러려면 시간의 가치를 측정해야 했지요. 정부는 거래소 공인 시간 측정 AI를 토대로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 상태, 생활 방식, 지식 수준, 전문 능력 등의 지표를 평가하여 잔여 수명을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담보로 주식에만 투자할 수 있도록 주식 시장 전용 가상 화폐인 타임머니로 바꿔 주었지요.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지 않아 돈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더욱 잔인한 것은 가족의 시간을 담보로도 투자할 수 있게 한 것이었어요. 빈곤층을 모조리 제거하겠다는 끔찍한 발상이 낳은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위 존엄사 기업들이 떼돈을 벌며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음……”
“사실상 시간 시장의 탄생에 일조한 저는 무척 괴로웠습니다. 친구를 시켜 사설 금융업체를 차린 후 사람들에게 무담보, 무이자로 자금을 대출해 주어 시간을 되사도록 했습니다. 계획대로 약 판 돈이 상당히 모였거든요. 그 다음 추가 대출을 통해 무조건 제가 추천하는 종목들에만 투자하도록 무료로 정보를 공개했습니다. 적어도 3~5년 안에 3~5배의 수익률을 낼 수 있는 3~5개의 우량주들만을 선정하여 사람들이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주가가 장기 박스권에 갇혀 있는 동안 회사가 지속적으로 좋은 실적을 내왔고 향후 성장성이 높은 사업을 영위하고 있어서 어차피 머지 않아 큰 상승세로 이어질 타이밍이었기에 제 조언에 따라 투자한 사람들은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일도 없었고 돈을 벌 수도 있었습니다. 최소한 기본 소득제는 유지되고 있었기에 적어도 생존은 가능했으니, 엉뚱한데 돈을 날리고 빚을 지는 상황에 처하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말을 들었어야 했어요. 정부나 존엄사 비즈니스로 막대한 수익을 내려던 자들에게는 제 친구의 회사가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를 제거하기로 결정했겠지요. 전방위 세무조사 등 친구 회사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흠 하나 잡을 수 없었지요. 완벽하게 관리해 왔으니까요. 그들이 친구와 친구 가족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막 나갈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조언을 듣고도 늦게 움직인 탓에 친구와 친구의 가족이 목숨을 잃었어요. 그들은 선을 넘었고, 저는 그들이 망치는 세상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제게 조언을 준 그 사람은 바로 사장님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사장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장님이 저를 찾아 주신 겁니다. 지금의 사장님이 미래에 말이지요.”
“박 실장님?”
“예, 사장님.”
“당신이 저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얘기까지 했으면 저는 아마 감당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걸 알기에 지금 들려주시는 걸 테지요.”
시우는 노을 빛을 받아 빛나는 지원의 눈동자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놈들은 제 연구 자료를 노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뒤져도 미래의 제게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제 머릿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것이 놈들의 선택을 한정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반면 그렇기 때문에 제 곁에 계시는 것이 위험하죠. 그래서…….”
“아닙니다 아녜요. 그 다음은 듣지 않기로 해요. 언제나 제가 더 고마운 마음입니다. 당신이 바꾸려는 세상에는 당신이 필요하답니다. 그 순간까지 같이 가봐요, 우리.”
세상을 바꾸려면 긴 세월을 견딜 젊음과 열정, 그리고 돈과 사람들이 필요했다. 시우에겐 무엇보다 지원이 있었다. 시우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