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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Oct 17. 2024

시간 시장(Time Market)-14

계획

시우와 지원은 처음으로 숙소에서 멀리 벗어나 호수의 시원이 있는 산의 안쪽으로 산책했다. 두 사람조차 알아채기 어렵게 경호원 둘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은밀하게 따라왔다. 

“총자본 500억입니다. 사장님과 저 포함 모두 열 명의 이름으로 50억씩 분산된 상황입니다.”

“큰 돈이군요. 이제 뭘 하면 될까요?”

“각 20억 정도를 삼성전자 주식에 투자할 것입니다. 30년 정도 기다리면 천오백 배 정도 수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천오백 배? 천…….”

“하지만 우리는 15년 정도만 보유하여 백 배 수익만 보고 나올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니까요. 그렇게 번 돈은 미국 기업들에 재투자할 것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공하기 전의 초창기 기업들에게 투자할 것입니다. 그 자체로 전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세계 최고 기업들의 최대주주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전 세계 산업을 장악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을 테니까요.”

“이해했어요.”

“사장님. 그 전에 우리는 아예 미국으로 옮겨야 합니다.”

“미국으로요?”

“93년에 금융실명제가 실시됩니다. 지금처럼 차명으로 거래하는 길이 막히지요. 총 10개 명의로 분산하여 삼성전자 주식에 투자하는 돈은 향후 국내 아지트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미국으로 이민 가서 미국 국적을 취득해야 합니다. 미국인으로 신분을 세탁해야 해요. 추적을 피하는 데도 유리합니다. 돈이 도는 시장 주위를 살피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저를 발견할 수 있겠지요. 그들 역시 과거에 대해 학습하고 왔을 테니.”

“그렇겠군요. 한국은 좁으니.”

“그래서 떠나기 전 제가 먼저 그들을 찾을 것입니다.”

“뭐요? 어떻게?”

“유인해야지요. 그들의 눈에 보이도록 적당히 저를 노출할 것입니다. 그들도 돈이 필요하니 틀림없이 증권주들을 사기 시작할 것입니다. 3년 안에 20배 정도 벌 수 있을 테니까 놓치지 않을 거예요. 단, 그들이라면 시드 머니 마련을 위해 저와 같은 방법은 쓰지 않을 겁니다. 잡힐 확률이 낮다고 생각할 테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처럼 신분이 없으니 공무원을 매수해서라도 마련했겠지요.”

“일단 증권주로 대박 내는 사람을 찾아야겠네요?”

“예. 올림픽이 끝난 겨울에 상투가 만들어지니 아마 끝까지 먹고 그때 정리하려 할 거예요. 우리처럼 장기 플랜이 없을 테니 탐욕을 누를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군요.”

“과거로 보내진 사람들 중에 저를 도운 친구가 섞여 있을 겁니다. 가족을 무기로 그 친구를 협박할 회사와의 협상 조건으로 저를 찾아 제 연구 자료를 확보하는 안을 제시하기로 했어요. 그들이 절대 포기하지 못할 것이 그것이고 제 자료를 아무나 알아볼 수는 없으니까 틀림없이 친구의 제안을 받을 겁니다.”

“그럼 친구분을 만날 생각이세요?”

“아닙니다. 그건 서로에게 위험합니다. 그 친구를 통해 어렴풋이 저의 그림자를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할 거예요. 저를 적당히 노출하는 방식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저를 대신해 그 친구와 소통하고 우리의 투자도 담당할 파트너를 물색 중입니다. 이 두 사람이 국내의 일을 맡아 줘야 해요. 그 동안 우리는 미국에서 자리를 잡을 것이고, 친구와의 재회는 그로부터도 한참 후 미국에서 이루어질 거예요. 친구 역시 국내에서 기반을 닦고 힘을 키우면서 추격자들을 역추적할 것입니다. 적의 실체를 알아야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정보를 조절할 수 있을 테니까요.”

“똑똑한 적이라면 싸움이 치열하겠네요.”

“예.”

“어쩌면 서로 적당히 타협하면서 당신이 살던 그 시대가 올 때까지 승부를 미룰 지도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당신이나 적이나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힘을 가지려면 지식과 정보를 활용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물새 한 쌍이 수면에 닿을 듯이 저공 비행하며 둘의 앞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새들의 그림자를 쫓던 두 사람의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가끔은 사장님이야말로 미래를 읽으시는 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가요? 제가 박실장님보다 더 가진 건 나이 밖에 더 있어요? 그저 경험으로 드리는 말씀이지요. 인간이란 현재를 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현재에 투영된 미래를 사는 존재죠. 미래의 자기 모습을 그리는데 익숙한 사람이 현재를 즐기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요. 우리만 해도 이 좋은 풍경을 앞에 두고 다른 얘기만 하잖아요? 이 아름다운 물빛도 이 싱그러운 바람도 바람이 실어오는 숲의 향기도 모두 제쳐두고 말이죠. 당신을 아는 똑똑한 적이라면 분명 당신의 연구 자료를 확실히 손에 쥘 수 있는 시점까지 가볍게 움직이지 못해요. 당신도 그걸 알고 그가 당신을 불시에 찾아올 수 있는 방식의 노출은 절대 하지 않을 테구요. 자료도 결코 한 군데에 모아 놓지 않을 것이고, 모여 있는 자료도 당신만의 방식으로 조각조각 내놓을 것이고. 어차피 AI 없이는 그 조각을 맞추지 못한다면 섣불리 접근해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어설픈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봐요.”

담담하게 풀어 내는 지원의 말에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없이 눈앞의 현재에 집중해 보았다. 티끌만큼의 오염 물질도 허락하지 않은 듯 투명한 호수에 하늘과 구름, 나무와 풀,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시우는 눈을 감고 폐부를 활짝 열어 길게 심호흡했다. 맑은 공기가 한아름 파고들어 몸 안의 탁한 기운을 쫓아내는 기분이 들었다. 

“좋죠?”

시우가 눈을 뜨자 지원이 물었다.

“네, 정말 좋습니다.”

“사실 박 실장님 연구에 바쁘실 때 혼자 이곳까지 자주 걸었어요. 여기 오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죄송합니다.”

“뭐가요?”

“혼자 오시게 해서.”

“별 말씀을 다하시네요.”

“그리고 미리 상의 드리지도 않고 당연한 듯이 미국 이민 말씀을 꺼낸 것도.”

시우가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지원에게 사과했다. 지원이 따뜻한 시선으로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부드러운 햇살처럼 시우의 얼굴을 쓰다듬는 느낌이었다.

“그런 말 말아요. 당신의 길에 함께하겠다는 것은 저의 의지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전산면을 떠나 서울로 갔던 것, 서울을 떠나 이곳으로 내려온 것과 이 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이 다르지 않아요. 영원히 떠나는 것도 아니고 더 스케일 크게 세상을 즐기는 일이 될 테니 무척 설레요. 그러니 다시는 그런 식으로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셨죠?”

시우의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걱거렸지만 시우는 차마 내색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뒤 늘 고독하게 자신의 길에 홀로 서 있던 시우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혼자 앞서가는 시우의 곁으로 사람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도 한참 기다려야 헐떡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오직 죽마고우 철훈만이 시우가 자신의 마음을 밑바닥까지 열어 보인 유일한 벗이었다. 시우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술 한 잔 할래요?”

지원이 왼쪽으로 슬쩍 걸음을 옮기며 제안했다. 시우의 몸도 반사적으로 지원의 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좋습니다. 술은 사장님이 드시고 싶은 것 챙기세요. 오늘 저녁 식사와 안주는 제가 제대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진짜요? 저 맥주도 마시고 와인도 마시고 소주도 마실 건데, 안주 다 가능하시겠어요?”

“그럼요. 오랜 자취 경력 한 번 살려보겠습니다.”

“저 맛없으면 안 먹는데…….”

지원이 일부러 얄궂은 표정을 지었고, 시우는 그런 지원이 정겹게 느껴졌다.

“너무 맛있다고 저 죽은 줄도 모르고 혼자만 드시면 안 됩니다.”

“호호. 농담이예요. 둘이 힘 합쳐서 좀 많이 만들도록 해요. 간만에 경호원 분들도 맛난 것 좀 드시게.”

“하하. 그럴까요?”해가 중천에서 서산을 향해 조금씩 미끄러지고 있었다. 호수의 살갗을 어루만지고 온 실바람이 시원했다. 바람의 꼬리에 앉아 있던 꽃 내음이 콧잔등에 내려앉았다. 세월이 아득하게 흘러도 이 날의 향기를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시우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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