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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Oct 18. 2024

시간 시장(Time Market)-15

편지

“좋아, 아주 좋아요. 우리 차 전무님, 머리 좀 쓰셨어요. 하하하.”

거만하게 앉은 석우가 박수를 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김 팀장. 아니 김철훈씨. 당신 이모부 잘 둔 줄 알아. 차 전무님 덕에 좋은 시절로 돌아가 제2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말이야. 돈 버는 맛에 임무 까먹지 말라고. 하루라도 약속을 어기는 순간 니 와이프와 자식들은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거란 걸 내 약속하지.”

웃음기가 싹 가신 정색한 얼굴로 석우가 철훈을 노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저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테니 당신도 약속을 지키시오.”

철훈이 굳은 표정으로 석우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곧 죽어도 선배라고는 안 하는군. 걱정 말라구. 당신이 똑바로 일하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명심해. 내일 날짜로 아무 것도 도착하지 않으면 바로 내일이 당신 가족의 제삿날이라는 걸.”

말을 마치고 잠시 침묵하며 철훈을 노려보던 석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자, 잘 마무리 됐으니 김철훈 팀장의 무운을 빌어 줍시다. 차 전무님께서 필요한 것 챙겨 주시고 전송까지 잘 마무리 지으실 수 있으시죠?”

“무, 물론입니다, 사, 사장님. 염려 마, 마십시오. 전송하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래. 그럼 수고해 주시고, 먼저 가서 한 잔 빨고 있을 테니 끝나시면 곧바로 넘어오시죠.”

“아, 알겠습니다, 사장님.”

석우가 철훈의 어깨를 툭 치고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영철을 제외한 다른 임원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철훈을 향한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다음날 오후 2시, 석우 앞으로 오래되어 낡은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등기로 온 것이어서 우체부가 직접 사장실을 방문하여 전달했다. 석우는 즉시 동생 석주를 불러 함께 편지를 읽었다. 


편지 1

이석우 사장님 귀하

예상대로 오시우는 신분을 세탁하여 여러가지 사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듯합니다. 현재로서는 그로 보이는 인물이 다수인 관계로 계속 조사 중입니다.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라 파악이 쉽지 않지만 저 역시 충분한 자금을 마련한 상태로 머지 않아 그의 꼬리를 밟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편지는 오늘과 동일하게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 도착할 것입니다. 오시우의 소식을 계속 받고 싶다면 제 가족의 안위가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모든 편지는 제 가족의 생존 여부가 확인된 뒤 배달되는 조건이니까요. 제가 돈을 벌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압력을 행사하여 우체국을 통해 편지를 가로챌 생각일랑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서울 전역의 우체국 직원들에게 이미 이 편지들에 얽힌 사연은 전설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물론 이 사연은 당신은 알 수 없는 현재의 사람에게도 동시에 보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 가족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순간, 이것과 동일한 편지와 함께 당신들의 비밀에 대한 폭로 기사가 터질 테니까요. 

아, 그리고 차 전무님도 괴롭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내 계획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셨으니까요. 

그럼 다음주에 또 뵙겠습니다. 

김철훈 


“하, 이 새끼, 대가리 많이 굴렸네.”

석우가 편지지를 공중에 뿌리며 내뱉었다.

“그러게. 하여간 조선놈들 잔대가리 굴리는 거 알아줘야 한다니까. 어쩔 생각이야, 형? 이 새끼 지인이라는 놈도 추적해야겠네?”

“당근 찾아야지. 아, 이 좆만한 새끼가 우리를 갖고 노네. 하, 씨발.”

“뭐, 두 놈이 원래 친한 친구 사이였으니까 둘이 짝짜꿍할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잖아?”

두 형제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씨발, 이도 저도 좆같으면 최후의 수단 쓰면 그만이지 뭐. 어떻게든 찾아 조지면 돼. 일단 현재의 오시우, 김철훈 둘다 추적해 보자고. 분명 둘 다 저기 밖에 있다, 이 새끼들.”

“안개 속에서는 보이는 것에 사로잡히지 말자구, 형.”

“그래 그래 명심하고 있다. 하지만 거짓말이라도 상관없어. 거짓말에도 패턴이 드러나는 법이거든. 소설에는 한계가 있어요. 편지들 분석하면 빈틈이 보일 거야.”

“그럼 그럼. 그래도 간만에 인생이 좀 버라이어티해지니 재밌다. 형의 신조 대로 대드는 것들은 다 밟아 터뜨리자구.”

“오케이. 쓰레기들에게 우리의 실력을 함 보여 주자고.”

두 형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200층 아래의 여의도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편지 2

이석우 사장님 귀하

당신은 일주일 만에 받는 것이겠지만 이 편지는 첫 편지 이후 10년이 경과한 시점에 보내는 것입니다. 10년 간의 추적 끝에 마침내 오시우의 실체와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의 얼굴을 확실히 알아보았습니다.

오시우는 박지훈이라는 신분으로 세탁한 뒤 부동산과 주식 시장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모든 투자는 제3의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그는 늘 수면 아래에 있습니다. 그의 조력자들 중 한 명과 접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는 당신의 철학은 옳아 보입니다. 

다음 편지에서 오시우의 계획에 대해 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일단 박지훈을 추적하세요.

김철훈


편지 3

이석우 사장님 귀하

오시우의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내가 오늘 그를 제거해 버렸으니까요. 이 편지는 두 번째 편지 후 다시 3년이 경과한 시점에 작성되었습니다. 곧 연대 측정을 하시면 바로 확인되겠지만.

그는 미국으로의 은신을 기획했던 것 같습니다. 정치가 불안정한 한국을 떠나 큰 시장에서 힘을 키우겠다는 생각이었겠지요. 

그의 수하를 매수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오시우도 남자였습니다. 어쩌다 사랑에 빠진 그는 목표 의식을 상실하였습니다. 그의 수하를 통해 그의 앞에 얼굴을 드러내자 그가 당혹스러워 하더군요. 그는 저를 회유하려 했지만 당신에 의해 제 가족이 위협 받고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습니다. 우발적 사고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나약한 놈의 이상을 돕기 위해 제 인생을 날리고 제 가족의 생명까지 위험에 빠뜨렸던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시신이 있는 주소를 아래에 남깁니다. 그곳에서 다음주 금요일 이 시간에 만납시다. 오 회장의 손발톱 하나씩을 동봉합니다. 분석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 동안 이루어 낸 것이 당신들에게 도움될 겁니다. 아마 당신들은 지금 오시우의 연구 자료에 더 관심이 있겠지만. 오시우는 약을 완성했습니다. 샘플 2개를 보냅니다. 기존 것보다 효과가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연구 자료 또한 제 손에 확보되어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킬레스 건을 성공적으로 처리했습니다. 이제 나는 완전한 자유를 원합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제국을 마음껏 구축하십시오. 당신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내가 갖고 있는 오시우의 자료는 곧 당신들의 것이 될 수도 영영 폐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냥 나의 것으로 남을 수도 있겠지요. 

이 사람 저 사람 주렁주렁 달고 오지 말고 두 분만 오십시오. 당신 둘 외에 다른 사람들은 어차피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편지입니다.

김철훈

충남 XX군 XX읍 XX리 산 170-1


“야, 김철훈 이 새끼. 소설 잘 쓰네. 어, 경호실장 좀 들여보내.”

경호실장 승준이 들어오자 석우는 세 번째 편지를 보여 주었다. 

“만반의 대비를 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까 전력 강화하고, 이 주소지 일대 철저히 감시 들어가.” 

“예, 사장님.”

“그래 그래. 나가면서 비서실장 좀 들어오라고 해.”

석우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승준의 어깨를 툭 쳤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날카로운 눈매의 비서실장 이주영이 들어와 인사했다.

“그래. 중요한 일정들 브리핑해 봐.”

“내주 월요일 KBC 9시 뉴스 출연, 화요일 타임지 인터뷰,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던 안젤라 최 미팅 건이 목요일에 있습니다.”

“아, 맞다. 안젤라 최. 5경 부자라는 재미교포 년. 고려증권 김하영 사장이 다리 놔주는 거였지? 그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네. 마침 기막힌 타이밍에 김철훈이 선물을 보냈군. 하하하.”

“네?”

“아냐 아냐. 저기 그리고 우리 바이 현황은 어때?”

“하루 열 건씩 향후 5년치의 전송이 풀 예약되어 있고 이후에도 계속 차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 서로 뒈지겠다고 난리군.”

“네?”

“아냐 아냐.”

석우가 흡족해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도리도리했다. 

“그런데 이석우 부사장님은 요즘 안 보이시네요?”

“응? 어, 내가 어디 출장 좀 보냈어. 석주 말고 믿을 사람이 있어야지. 근데 왜? 석주 보고 싶어?”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사장님.”

“아냐 아냐, 실례는 무슨. 나가 봐, 이 실장.”

“네, 사장님.”또각또각. 주영이 인사를 마치고 경쾌한 하이힐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주영의 뒷모습을 보고 입맛을 다시던 석우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김철훈, 뭘 준비했든 나를 만족시켜야 할 거야. 입에 쓴맛이 돌았다. 석우의 눈에 샘플이 담긴 약통이 들어왔다. 6개월에 1회 복용. 통에 붙어 있는 글귀에 석우가 미소 지었다. 뚜껑을 열어 약 한 개를 덜어 먹었다. 쓴맛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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