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종호 Oct 18. 2024

시간 시장(Time Market)-16

파트너

빗방울이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날이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이따금씩 먹구름을 움켜쥐어 비를 짜냈다. 구름안개 사이로 살짝 드러난 남산의 살갗도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우는 며칠 째 서울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지원에게 안부 전화를 하려던 마음을 다잡고 시우는 약속 시간을 기다렸다. 알람이 울렸다. 이제부터 내려가면 5분에서 10분 정도 늦을 것이었다. 만나기 부담스러운 존재일 것이 분명한 자신보다 오늘의 상대가 일찍 와서 기다리며 분위기에 익숙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의도적인 지각이었다. 결례에 대한 보상은 두둑하게 준비해 둔 상태였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호텔 1층 라운지 창가 좌석에서 비 오는 날의 풍경을 감상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하영 맞은편에 멈춰선 시우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일찍 온 것뿐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했다. 

“앉으시지요.”

“네, 회장님. 커피 괜찮으십니까?”

“김 대리님 먼저 시키신 것 같아 들어오면서 카운터에서 주문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시우는 하영을 처음 본 순간이 떠올랐다. 시우는 여의도의 증권사 객장들을 돌아다니며 하영을 찾았다. 그녀는 훗날 여자로는 최초로 증권사 사장 자리에 오를 인물이었고, 시우는 그렇게 능력과 수완을 가진 조력자가 필요했다. 시우는 하영의 성공을 앞당기기로 했다. 하영에게 운명적인 멘토가 되는 것이 시우의 계획이었다. 시우는 그녀가 자신의 계좌 전담 직원이 되는 조건으로 고려증권에 거액을 맡겼다. 지원의 직원 중 한 명인 장동구가 시우를 대신해 증권 업무를 담당했다. 증권사에서는 그가 모신다는 박 회장의 정체를 궁금해했지만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영은 장동구로부터 박 회장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쪽지를 받고 나온 것이었다. 


“생각보다 젊죠?”

시우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예, 조금 놀랐습니다.”

“궁금했을 거예요. 제가 왜 김하영 대리님을 콕 찍어 돈을 맡겼는지.”

“사실 그랬습니다.”

“제 조부께서 관상을 보셨습니다. 성공하려면 사람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면서 어린 제게 관상학을 가르치셨죠. 객장을 다니면서 직원 분들의 상을 보았습니다. 하영 씨를 보고 알았지요. 크게 성공할 분이라는 것을. 그러니 제가 누구에게 돈을 맡기겠습니까? 하영 씨가 계신 덕분에 제가 걱정 없이 돈을 맡길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겠지요.”

“별 말씀을 다하세요, 회장님. 제가 한 것이라곤 주문대로 주식을 샀을 뿐인 걸요.”

“이건 하영 씨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시우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금박 처리 된 고급 봉투를 꺼내 하영에게 건넸다. 하영이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열어 보세요.”

봉투를 열어 본 하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5억원짜리 수표였다.

“이렇게 큰 돈을 왜 제게?”

“너무 놀라지 말아요. 그 돈은 하영 씨의 미래에 대한 제 투자이자 계약금입니다.”

“계약금요?”

“계약서는 없어요. 앞으로도 저와 좋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해 달라는 것이 조건이라면 조건입니다. 저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 주실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보는 하영 씨는 오래도록 증권사에서 근무할 것입니다. 저는 하영 씨에 대한 투자가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자질이 있는 분이니까요. 이 돈으로 평수 넓은 아파트를 장만하세요. 부모님 용돈도 넉넉히 드리시구요. 나머지 절반은 저축을 하시고 절반은 삼성전자 주식을 사서 묻으세요. 그리고 백 배 수익을 넘어서는 날 모두 현금화 하십시오.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고 잠재력을 마음껏 피우는데 시간을 모두 쓰세요. 일단 야간대학에 들어가시고, 그 다음은 석사, 박사 학위도 따시구요.”

“회장님, 왜 제게 이렇게 잘해 주시나요?”

“말씀 드렸잖아요. 저 관상 공부했다구요.”

하영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시우는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지방의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증권사에 취직한 하영은 온갖 허드렛일만 하다가 성실한 업무 태도와 영특한 두뇌를 눈여겨본 상사에 의해 발탁되어 창구에서 일하게 되었다. 빼어난 미모 탓에 고객과 직원들로부터 온갖 성희롱을 받으면서도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버텨온 나날이었다. 

“사는 일이 쉽지 않죠?”

하영이 대답 대신 입을 앙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영 씨는 운명을 믿으시나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솔직히 대답해 주셔서 고마워요. 지금은 어때요? 제가 운명처럼 다가온 사람 같지 않나요?”

“네, 그렇습니다.”

“오래 살진 않았지만 저는 운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하영 씨와의 인연 역시 제겐 운명적이니까요. 물론 오직 좋은 쪽으로만 그렇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네, 회장님.”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올림픽 이후 저는 미국으로 완전히 들어갈 것입니다. 이민입니다. 미국에서도 투자업을 할 겁니다. 제 한국 파트너가 되어 주세요. 하영 씨라면 믿을 수 있어요. 그리고.”

시우가 철훈의 사진과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번 증권주 랠리가 끝나면 대박을 친 사람들 중에 이 사람이 있을 겁니다. 다른 증권사들을 통해서라도 이 사람을 꼭 찾아 이걸 건네 주세요. 내일 하영 씨는 전략투자기획팀장으로 발령 받을 겁니다. 제가 하영 씨 지점에 큰 돈을 추가로 예탁했거든요. 하영 씨는 충분히 잘 해낼 것입니다. 저도 다 알아 맞추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의 세계 경제와 국내 경제의 큰 흐름이 보일 때마다 의견을 전해 드리도록 할게요. 큰 흐름에 맞추어 가기만 하면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예, 회장님. 저를 선택해 주시고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하영 팀장님은 능히 그러시고도 남음이 있을 겁니다. 대신 너무 부담 갖지는 마십시오. 그건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몸 상할 정도로 일만 하시면 안 돼요. 맛있는 것 끼니 때마다 챙겨 드시고, 운동 꾸준히 하시고, 틈나는 대로 인문 고전 공부도 하시면서 교양도 기르시고 통찰력도 키우시는 게 더 중요합니다. 아셨죠?”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하영의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하영의 선한 인상에 더해진 환한 표정이 시우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시우가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집 계약하고 전화 놓는 대로 이쪽으로 연락처 남겨 주세요. 참고로 한 10년쯤 후에는 틀림없이 일반인들이 모두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시대가 올 겁니다. 반도체와 더불어 제가 삼성전자에 투자한 이유이고 하영 씨가 그 회사 주식을 사야 할 이유이지요. 하영 씨, 늘 상상하세요. 하영 씨가 상상하는 대로 세상은 흘러갈 것입니다. 인간은 상상하는 대로 이루는 존재이니까요. 상상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주도해 갈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파트너 된 기념으로 우리 악수할까요?”

“네, 좋습니다, 회장님.”

“미국에서 자리잡는 대로 초대할 게요. 일년에 한두 번은 꼭 미국에 다녀가세요. 미국에서 세계의 변화를 느끼셔야 합니다. 물론 그 전에도 가끔 연락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하영의 감격해 하는 눈빛을 받으며 시우가 미소 지었다. 철훈과 함께하는 하영의 존재는 한국에서의 일을 원활하게 조직하고 전개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