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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Oct 19. 2024

시간 시장(Time Market)-17

사랑

두 가지 버전의 약은 완벽한 효능을 증명했다. 청학리 과수원과 밭을 매입한 후 정착한 직원들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원주민들과 그들이 지정한 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물론 시우는 이미 그 결과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실험이라기 보다 선물이었다. 청학리를 완벽한 전략적 폐쇄 공동체로 육성하는 것과 고마운 사람들이 자신들의 꿈을 이루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시우의 보은이었다. 

서울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흘렀다. 지원과 함께 날마다 청학리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정리 받고 자료로 기록하느라 바쁜 나날이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청학리에서 날아온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시우는 곧바로 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지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출타할 경우 반드시 서로에게 사전 공지하기를 두 사람 모두 어긴 적이 없었다. 세번 째 전화마저 연결되지 않자 시우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달리며 경호 초소에 무전을 쳤다. 

“한 분만 사장님댁으로 와 주세요!”

지원은 식은 땀에 젖은 채 거실 바닥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기태 씨, 사장님을 치료실로 옮겨 주세요. 서둘러 주십시오.”

만에 하나라도 지원이 아플 경우를 대비해 병원 응급실에 준하는 설비와 의약품을 지원의 집 지하에 갖춰 두고 있었다. 의대 출신인 자신의 오만이었다. 지원의 건강을 너무 과신한 무관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책할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의식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생체 신호들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저혈압 쇼크로 보였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기태를 보낸 시우는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았다. 자신보다 10년 연배인 지원의 건강에 더 신경 쓰지 못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누구보다도 먼저 신약을 줬어야 하는 사람인데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늘 곁에 있다 보니 어느새 사람을 사물 대하듯 하는 자신의 고질병이 도진 것이었다. 

지원의 고요한 얼굴에 머리카락 몇 올이 내려와 있었다. 시우는 머리카락을 정리하여 올려주며 지원의 새치와 주름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 삶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었다. 뚜렷한 목표를 가진 자신과 달리 지원은 아무런 계산 없이 자신의 길에 동참해 준 사람이었다. 만일 그녀가 동의해 주지 않았다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희망의 싹을 틔우는데 아주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을 것이었다. 

시우는 악수할 때를 제외하고 지원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다. 지원의 손은 온기 하나 없이 차가웠다. 그랬구나. 이렇게 냉한 몸으로 살았으니 면역력도 약했을 것이고, 혈액 순환도 좋지 않았을 테지. 시우는 지원의 왼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고 손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자신의 온기로 지원을 지켜 주고 싶었다. 두 번 다시 아프지 않게,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깼어요?”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침대에 엎드려 잠들었다 깬 시우의 눈에 혈색이 돌아온 지원이 상체를 세운 모습으로 다정히 미소 짓고 있었다.

“괜찮아요?”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지켜주지 못해서.”

이번엔 지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내가 더 미안하죠. 괜한 걱정을 끼쳤네요. 그런데 계속 잡고 있을 거예요?”

그제서야 시우는 자신이 아직도 지원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원의 말에 손을 놓으려다 시우는 오히려 손을 더 꼭 쥐었다. 지원이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 이젠 안 놓으려구요. 당신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며 알았어요.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당신 없이는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는 것도.”

“고백인가요?”

“받아줄 거죠?”

“아뇨.”

“네?”

“밥 먹고 생각해 볼게요. 나 배고파요. 맛있는 거 해주면 긍정적으로…….”

시우가 몸을 일으켜 지원에게 입을 맞췄다. 


“바보 같은 사람.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당신을 받아들였답니다. 염치가 없어 다가가지 못했을 뿐.” 

입술이 떨어졌을 때 지원이 시우의 얼굴에 대고 속삭였다. 

“나 누군지 알죠? 우리의 여정은 아주 길고 오랠 거예요.” 

시우가 지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좋네요, 그 말.”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연인처럼 길고 긴 키스를 나누었다. 채린을 만나고 온 시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원과 사랑에 빠질 운명이라는 것을.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연인이 된 두 사람은 다정히 손을 잡고 호숫가를 거닐었다. 가을 햇살은 따뜻했고 공기는 싱그러웠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이토록 가슴 벅찬 일이었구나, 시우는 생각했다. 운명은 이런 것이었구나. 세상을 바꾸겠다고 마음 먹지 않았으면 사는 동안 결코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시우에게는 지원이 곧 운명이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일이었다. 사랑이란, 이런 사랑이란 그 자체로 운명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해요?”

생기가 돌아온 지원이 맑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운명을 사랑하겠다는 생각요.”

“니체처럼요? 그러고 보니 시우 씨는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일지도 모르겠네요.”

“사랑으로부터 소외되었던 니체는 사랑마저도 초극하기를 원했을 테지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언제나 당신을 최우선으로 선택하겠습니다. 당신이 내 운명이니까요.”

시우는 지원을 똑바로 마주하고 서서 바람에 나풀거리는 지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그 동안 말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 정말 아름답습니다.”

“나, 늙었는데요?”

“아뇨 전혀.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함께 늙어가도 좋을 운명이라면 당신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나는 좋아요.”

“그럼 약 먹지 말까요?”

“그건 안 돼요. 우리 일 다 끝내고 그때부터 같이 늙읍시다.”

시우가 지원의 코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비트는 시늉을 했다가 코끝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기대되긴 하네요. 다시 젊은 날의 나로 돌아간다는 게.”

“외모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 기능도 젊어진답니다. 이번 기회에 당신을 더 건강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몸이 많이 차서…….”

시우가 말을 마치기 전에 지원이 시우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제 괜찮아요. 당신이 따뜻하잖아요.”

시우는 지원을 꼭 끌어안았다. 그래. 서로의 체온으로 충분할 거야. 

“당신이 나를 먼저 찾아 주었다고 한 말 기억해요?”

“응, 기억해요.”

“그때 당신을 알지 못했던 나는 당신이 낯설지 않았어요. 당신은 지금보다 훨씬 젊고 도도한 모습이었죠. 그리고 내게 들려줬어요.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는지. 실감 나진 않았지만 그 말에 저는 무척이나 기뻤답니다. 당신은 정말 매력적이었으니까요. 그때 당신이 내게 말했어요. 길 잃지 말고 잘 찾아오라고. 그리고 서로가 정말 사랑하게 될 때까지 내색하지 말라고. 그래서 당신은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알려 주지는 않았지요. 과거의 당신에게 다시 그 설레는 기분을 느낄 기회를 주고 싶다고.”

“그럼 언젠가 나는 또 다른 당신을 만나게 되겠군요. 아무 것도 모른 채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나처럼, 그 사람도 그렇게 나와 만나겠네요.”

“이런 사랑, 아무나 못하는 특별한 거 맞죠?”

시우의 질문에 지원이 잠시 몸을 떼고 손바닥으로 시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특별한 사랑 선물해 줘서 고마워요, 시우 씨. 어떻게 운명의 힘을 믿지 않을 수 있겠어요? 당신과 내가 이렇게 함께 있는데. 그래도 나는 알아요. 당신이 행복하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그럴 수 있도록 내가 도울 게요.”세상 그 무엇도 방해하지 않는 긴 시간을 두 사람은 키스로 채웠다. 그것은 너무도 감미로워서 한시도 멈추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새들이 호수 위를 낮게 비행하며 웃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손을 잡고 오두막을 향해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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