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
“어서 오십시오, 최 회장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을 올라와 하영과 나란히 회사 1층 현관으로 들어온 안젤라 최에게 석우는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옆에 늘어선 임원들도 석우를 따라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릴 정도로 과장된 몸짓이었다.
“반갑습니다. 회사 건물이 아주 멋지군요. 최고의 회사를 방문하게 되어 저 또한 영광입니다. 안젤라 최입니다.”
“하하하. 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희 회사 건물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하하. 자, 사무실로 올라가시지요. 저희 회사는 최상층부터 아래로 10층을 쓰고 있습니다.”
“뷰가 아주 좋습니다.”
회의실에 들어선 안젤라가 창가로 다가가 한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석우가 안젤라의 곁으로 다가서며 대꾸했다. 하영도 둘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 마음에 듭니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조국이 세계 3대 강국이라는 사실이 실감나네요.”
“그러십니까? 아직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서는 격차가 좀 있기는 합니다.”
“작은 땅에 적은 인구, 그것도 청장년층의 비중이 현격히 낮은 가운데에서도 이룬 성취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우리나라를 더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입장이지요. 통일 한국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으니까.”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녜요, 무슨 말씀을. 우리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하신 말씀도 아니실 텐데.”
“그럼요, 물론입니다. 저 역시 제 조국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걸요. 하하하. 그러나저러나 오래 전에 미국으로 가셨다고 들었는데 연세에 비해 정말 젊으십니다.”
석우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렇죠?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몸에 좋은 것 잘 먹고, 운동하고, 해피하게 사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지요.”
“아, 그렇습니까? 잘 새겨 듣겠습니다.”
석우의 표정에 은근한 비웃음이 흘렀다가 재빨리 사라졌다.
“그런데 이 사장님도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시는데요?”
“하하. 사실 제게도 비결이 있긴 있습니다.”
“그래요? 궁금하네요.”
“이제 자리에 앉아서 말씀 나누실까요?”
석우가 안젤라에게 뒤쪽 회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아뇨, 이대로가 좋습니다. 잠시 후에 다른 곳을 가 봐야 해서.”
순간 석우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쳤고, 그의 시선이 하영의 눈동자에 가 닿았다. 하영이 무심하게 석우의 눈빛을 받아 주었다가 다시 한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사장님, 얼마 필요하십니까?”
안젤라가 석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30조입니다.”
갑작스런 안젤라의 공격에 순간 움찔했지만 석우는 당황하는 티를 내지 않고 곧바로 맞받아쳤다.
“그 정도 금액은 국내 조달도 가능하실 텐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 회사는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싶습니다. 신속히 세계 주요국에 거점을 만들고자 합니다. 거기에, 이것은 대외비입니다만, 저희 생명공학연구소에서 그간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 온 회춘 신약 개발이 완성 단계이기에 한국을 포함해 미국과 유럽에 첨단 제조 공장까지 동시에 지을 예정입니다. 일거에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초기 투자금입니다. 제가 진짜 원하는 것은 더 큰 일을 회장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오, 그런 게 있습니까? 그런 거라면 단숨에 세계 탑 파이브 기업을 향해 갈 수도 있는 아이템인데요. 글로벌 빅파마들이 엄청난 돈을 까먹고도 진전을 보지 못한 분야인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러고보니 이 사장님의 비결이라는 게 이거였나 보군요. 이번 실사에 포함되는 겁니까?”
“하하. 본의 아니게 제 비결을 들켜 버렸습니다. 하하하. 정식으로 식약처 허가를 득한 후 시제품을 보여 드릴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신 연구 보고서는 실사 때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만, 사실 자체 검증은 오래 전에 끝났고 제가 정부에 선이 있어서 언제든 허가는 단숨에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설프게 하지 않고 전 세계 생산 시스템을 구축한 후 일제히 터뜨릴 생각이기에 타이밍을 기다려 온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올라간 어깨 만큼이나 석우의 목소리 톤에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저에겐 뭘 주시겠습니까?”
“지분 10%입니다.”
“40조에 20%. 지금 결정하실 수 있으면 일주일 간의 실사에서 이상 없을 경우 계약하지요.”
“40조라면 15%로 하시죠.”
“50조에 25%”
“예? 그렇게 지분율을 올리시면.”
“60조에 30%. 마지막입니다.”
석우가 침을 꼴깍 삼켰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석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듣던 대로 호남이십니다. 김 사장님? 일단 오늘 MOU까지 합시다. 실사는 알아서 챙겨 주시구요.”
“예, 회장님. 서류 준비해 왔습니다.”
하영이 다가오며 가방에서 서류 2부를 꺼내 그 중의 하나를 석우에게 건넸다.
“검토하시고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하영이 건넨 MOU 서류에는 디그니바이의 지분 30%에 대한 60조 투자 건이 적시되어 있었고 실사 후 본 계약이 체결되면 즉시 투자금 전액이 지불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석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석우는 안젤라가 이런 식으로 딜을 던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미 자기 뜻대로 진행될 것을 확신하고 모든 준비를 끝낸 후에 시간 낭비 없이 상대를 단숨에 코너에 몰아넣는 능력은 실로 부러운 것이었다. 돈. 돈의 진짜 힘은 이런 것이었구나. 씨발. 난 우물 안 개구리였다. 아직 갈 길이 멀구나.
하지만 결론적으로 잘된 협상이었다. 실제 투자금은 20조 정도면 충분했다. 나머지 40조의 실탄까지 굴러 들어왔으니 새로운 잔치를 벌여 볼 여력이 충분했다. 안젤라 같은 부자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석우의 개인 자산도 10조를 넘어 있었다. 내 자본으로 별도의 회사를 설립한 뒤 디그니바이의 알짜 사업을 그쪽으로 다 옮겨 놓는다고 한들 네가 뭐 어쩔 거냐, 안젤라, 30% 지분 가지고?
그래도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안젤라의 진정한 무서움은 미국 정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라는 막강한 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획은 수면 아래에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서두르지 말고 쉬지 말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가 좌우명으로 삼았던 이 말대로 해야 했다. 그래도 살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젤라 앞에서 자신이 한낱 아이처럼 느껴졌던 기분이 되살아나자 석우는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거울 속 얼굴에 주름이 늘어난 느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젤라와의 미팅이 끝난 후 석주를 보냈어야 했나? 아냐, 아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은 멍청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진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일단 지르고 보는 실행력이다.
가슴속에 스며들었던 더러운 기분을 씻어 버리려는 듯 석우는 잔에 담긴 위스키를 단숨에 비워 버렸다. 이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알코올이나 니코틴처럼 여자도 언제든 원할 때마다 취할 수 있는 소품 정도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자신에게 안젤라는 에베레스트의 빙벽처럼 거대한 여자였다.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그런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뱃속에서 열등감이 스멀거렸다. 석우는 다시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