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맨하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어느 초고층 빌딩 꼭대기 펜트하우스의 테라스에 시우와 지원이 서 있었다.
“오두막 첫날이 생각나는군요.”
“저도 그날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때가 된 건가요?”
지원이 맨하탄 거리를 굽어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원 씨.”
“우린 성공한 걸까요?”
“지금까진 잘 해온 것 같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나고 70년의 여정이었군요.”
“젊어 보이십니다.”
“호호호. 그러게나 말예요. 그 시절보다 더 어린 나이로 살다니. 왜 전 세계의 갑부들과 정계 거물들이 당신 약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지 알 만해요.”
“안젤라 최의 재력과 외모의 힘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요. 이 뉴욕의 절반이 안젤라 최의 것이니 말 다했지.”
“서울의 절반은 유채린의 것이구요?”
시우가 왼팔을 열자 지원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시우가 지원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지원이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킨 후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인공지능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지요?”
“제가 살던 시절의 대표적인 AI 회사들은 모두 손아귀에 넣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방해꾼이 있고 그 방해꾼과 손잡은 정치인들이 있어요. 일단 방해꾼을 제거해야죠.”
“맞아요, 제 생각도 그래요.”
“예. 속히 디그니바이를 처리한 다음 정치를 뜯어고치는데 주력합시다. 한국의 시간 시장에 대한 서구 정치권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시간 시장의 몰락을 생생하게 보여 줘야죠. 정치를 개혁하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키워 정계에 진입시킨 인재들이 활약해 줄 시기가 왔군요.”
“예,”
맨하탄의 밤공기에 서늘함이 배어 있었다. 시우는 지원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철훈 씨 올 때 되었죠?”
“예, 아마 거의 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저 왔습니다, 하는 철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 양반은 못 되겠네요.”
“시우야, 채린 씨?”
철훈이 달리다시피 거실을 가로질러 테라스로 나와 시우와 지원을 차례로 끌어안았다.
“또 이름 잘못 부르셨네요?”
지원이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농을 쳤다.
“아, 죄송해요. 한국에서 뵙고 또 금방 미국에서 뵙다 보니. 하하.”
철훈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미안해했다.
“철훈 씨한텐 농담도 못하겠다니까?”
지원이 빈 잔에 와인을 따라 건네며 웃음을 지었다.
“한 시간 정도면 하영 씨도 도착할 거예요.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저녁 준비할 게요.”
“이지훈 선생님?”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드림증권의 객장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철훈의 앞에 다가온 여자는 하영이었다. 하영은 철훈의 옆에 앉아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철훈의 손가락이 봉투에 닿으려는 찰나 하영이 철훈의 귀에 속삭였다.
“김철훈 선생님, 친구분이 전하시는 것입니다.”
하영은 곧장 일어나 철훈으로부터 멀어졌다. 철훈은 하영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봉투로 옮겼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철훈에게
나로 인해 그간 자네가 겪었을 고초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네. 운명이라고 생각하겠다는 자네의 말이 지금도 귀에 선명해. 잘못된 세상에 저항한 사람들처럼 우리도 고개 숙인 채 침묵하며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나 봐.
이석우 이석주 형제는 어떤 수단이라도 거침 없이 사용할 자들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네. 철저히 전략적으로 움직여 주게.
자네에게 이 서신을 전한 사람을 찾아가게. 고려증권 전략투자기획팀장 김하영. 그녀에게 동봉하는 수표를 맡겨. 앞으로는 그녀하고만 거래하게. 그녀가 우리의 헤르메스야. 그녀를 통해 자주 연락하겠네. 자네와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훗날을 위해 아껴 두겠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게. 또 소식 전하지.
자네의 벗, 시우.
* 이 편지는 밖에 나가자 마자 곧바로 소각시키게.
멀리서 느껴지던 은밀한 감시자의 눈이 옅어 지다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을 때 철훈은 시우와 만나고 싶었지만 시우는 허락하지 않았다. 둘의 해후는 시우가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1994년 여름 뉴욕에서 이루어졌다. 연일 살인적인 무더위가 지속되던 그해, 월드컵 열기까지 더해져 흥청거리던 미국에서도 뉴욕은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영이 건네 준 주소지를 외워 찾아갔던 곳이 리모델링 되기 전의 이곳이었다. 시우는 안젤라 최이기도 하고 유채린이기도 한 지원과 함께 철훈을 맞았다.
철훈은 시우의 뜻대로 다가오는 IMF 외환위기 이후의 벤처 붐 시기를 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우와 지원이 맡기고 간 오두막을 D-데이에 맞춰 준비시키는 것도 철훈의 몫이었다.
“어서 와라, 철훈아!”
“시우야!”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30대 초반의 젊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두 친구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자식, 여전하구나.”
“이게 너나 나나 드러내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지.”
철훈은 오두막 냉장고에서 시우가 남긴 몇 년치의 약병을 발견했다. 시간이 흘러도 젊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둘은 고대해 왔던 대로 밤을 지새우며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가 사랑에 빠지다니 정말 놀랐다. 물론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인정한다. 결론적으로 지원 씨 하고 인연이 되려고 다가온 그 많은 여자들을 멀리했던 거구나.”
“결국 사랑도 인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구축되었을 때 피어나는 감정이니까. 그땐 어떤 여자도 내게 믿음을 주지 못했어.”
“지원 씨는?”
“나 자신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야. 철훈아. 앞으로 좀 더 고생하자. 훗날 다 끝내고 너도 가족에게 돌아가야지.”
시우의 말에 철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 그래야지. 식구들에게 돌아갈 때 나는 겨우 몇 개월 떨어져 있던 사람일 테니 공백기를 크게 느끼진 않을 거야.”
“그래.”
시우는 앞으로도 40년 가까이 혼자 버티며 살아가겠다는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이후로 자신은 지원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자신을 도와 그 길을 걷고 있는 친구의 외로움을 감히 짐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우는 외로움이 사랑을 배운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