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가치 있는 사람입니까?”
에기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활자들이 제멋대로 춤을 추던 낡아빠진 옛 책들을 떠올리게 했다. 은희에게 그 책들이 보여준 것은 관념의 세계였다. 그래서 그 책들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관념의 세계에서 넘어온 지식과 사유는 세상을 사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 끌어올린 것이 현실세계에 쌓이면 쌓일수록 세상은 비뚤게 보였다. 비뚤어진 눈으로는 세상의 승자가 될 수 없었다. 성공으로 이어진 길은 오물로 범벅된 것이어서 악취를 긍정한 후에야 반듯하게 보였다. 돈을 번다는 건, 돈을 벌어 성공한다는 건, 그 냄새에 몸과 영혼까지 적셔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후각은 예민한 것이어서 은희가 승자의 체취를 갖게 되자 사람들이 곁으로 모여들었다. 승자가 곧 강자였다. 패배에 익숙한 평범한 사람들이 약자로서 강자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 그것이 세상의 실체였다.
“나는 승자입니다. 따라서 강자입니다. 능력 있는 강자들이 세상을 이끌어갑니다. 강자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원시시대에서 조금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약자들만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인류의 진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당신은 제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존재하려면 가치가 창출되어야 합니다. 황무지에서 흙을 퍼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쓸모 없는 땅을 개간하여 농작물을 거둔 후에야 먹고 사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가치란 그런 것입니다. 가치를 창출한 일만이 가치 있는 일이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씨앗을 심고 가꿨어도 거둘 것이 없으면 무용한 일, 무가치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치를 창출한 사람만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적습니다. 나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당신에게 대부분 귀속되는 데도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죽을 고생을 해서 책을 만들고 팔아서 거둔 이익으로 세금을 냅니다. 서점에서는 내 책을 팔아서 돈을 법니다. 작가도, 서점도, 그리고 책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도 내가 만든 가치의 혜택을 받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내 소득의 많은 부분을 주기적으로 소비했기 때문에 그 소비에 연결된 많은 사람들이 또 먹고 살았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작동해 왔습니다. 내가 가치창출을 멈추면 그 만큼의 가치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대신 그 만큼의 불행이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가치 창출을 중단하면 그럼 당신은 가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인가요?”
“사실 나는 평생 일하지 않고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 없을 만큼의 가치를 쌓아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일을 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일로도 나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중단할 일이 없는데 그것을 가정하고 가치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당신은 에그에서 어떤 가치도 창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적어도 여기에서는 가치 없는 사람일 수 있겠네요. 알겠습니다.”
에기는 파란색으로 변한 후 곧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은희는 창 밖으로 길어진 이웃 타워의 몸통에 경악했다. 은희는 20층으로 내려와 있었다. 전날의 대답으로 인해 수십 일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단 하루 만에 50층을 후퇴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은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인간의 음식으로 볼 수 없는 예전의 식사 메뉴도, 모습을 감추고 우스꽝스러운 질문 하나만 던져놓는 화면도 은희의 속을 터지게 만들었다. 에기를 만나려면 다시 40일을 거슬러올라가야 했다. 이런 불공정한 삶은 적어도 승자가 된 은희의 세계에는 없었다. 은희는 분노에 휩싸여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에그에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여서 절망은 다시 폐부 깊숙한 곳에서 스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