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XXIV

by 오종호

샤워를 하는 내내 민성의 뇌리에서 에기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나지 않았다.


“에그를 나가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 생각입니까?”


은희가 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일주일 만에 에기가 말을 걸었다. 민성은 99층에 머물러있었다.


“사람들에게 에그의 실체를 알릴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사람들이 당신 말을 믿어줄까요?”


“길은 제가 찾을 생각입니다. 당신들이 저를 막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 길은 무엇을 위한 길인가요?”


“사람들이 이유 없이 사라져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갇혀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 모른 척 할 수는 없습니다. 은희처럼 이곳을 버텨낼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당신들이 다시 저를 가둔다 해도 저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이유 없이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에기의 말이 민성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듯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의 길과 우리의 길은 하나의 목적지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민성의 옷이 개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옷이었다. 비로소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군청색 청바지와 검정색 반팔 티셔츠, 그리고 주머니가 많이 달린 빛 바랜 갈색 점퍼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노란색 제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민성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으로 안내하는 책상 앞의 빈 의자로 민성은 걸음을 옮겼다. 책상 건너편에는 역시 제복을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제복은 샛노래서 햇빛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진 자리를 꿰찬 것은 지드와 태양이었다. 민성은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며 하루 종일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졌다. 잠시 은희가 생각났다. 민성은 고개를 저었다. 에기의 말대로라면 은희는 자신 또한 에그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여자의 지시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는 기계에 왼팔을 집어 넣었다. 빠져 나온 손목에는 더 이상 번호가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가 건넨 금속 띠를 이마에 두르자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검은색 유리 마스크가 내려왔다. 남자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남자를 따라 정사각형 모양의 긴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는 창 밖으로 에그의 도시가 보였다. 민성 자신을 데려온 것처럼 에그 몇 개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거주자를 싣고 가려는 것인지 떠나 보내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통로의 끝에 도착하자 매끄러운 은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열차 한 대가 정차해 있는 플랫폼이 나타났다. 열차 앞은 곧장 터널이었고 플랫폼에는 약 스무 명의 사람이 줄 지어 서 있었다. 얼굴에 동일한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여행을 떠나려는 정거장의 풍경과 다를 바 없을 터였다. 줄의 맨 앞과 맨 뒤에 위치한 제복을 입은 두 사람의 신호에 맞추어 출입문이 열렸고 서로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순서대로 탑승을 시작했다.


총 40개의 좌석이 가운데 통로를 기준으로 한 줄에 두 개씩 늘어서 있었다. 한 줄에 한 사람씩 앉아 있었고 민성은 출입문 안쪽으로 들어와 통로를 걸어 우측의 맨 뒤에 앉았다. 맨 뒤 벽 중앙에 있는 별도의 좌석에 제복을 입은 사람 하나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한 명은 출입문 앞에서 실내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 문 밖으로 사라졌다. 출입문이 닫히고 천장의 등이 모두 꺼진 채 맨 앞 벽의 주황색 미등만이 남겨졌다.


열차가 출발하자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불려왔던 세상에서 다시 예전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에기가 다시 언제 어떤 만남을 준비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천장에서 흐릿한 연기 같은 것이 분사되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가물거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꺾고 잠들기 시작했고, 쓰러지는 민성의 눈에 방독면을 쓴 제복의 남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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