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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Jul 08. 2020

담백한 주역 <12.천지비괘天地否卦>-구오

막힌 것이 일시적으로 풀린다. 힘들었던 시절의 마음을 망각하지 말라. 



九五 休否 大人吉 其亡其亡 繫于苞桑

象曰 大人之吉 位正當也

구오 휴비 대인길 기망기망 계우포상

상왈 대인지길 위정당야


-막힌 것이 잠시 풀리니 대인에게 길하다. 잊지 않도록 우거진 뽕나무에 매어 두라.

-대인에게 길한 이유는 자리가 정당하기 때문이다. 



구오는 중정한 자리입니다. <소상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바르고 마땅한 자리이지요. 구사는 초육과 정응하고 구오 리더는 육이와 정응하니 이제 폐색閉塞의 기운이 거의 다 줄어들었습니다. 아래의 백성들이 대인의 뜻에 감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외호괘 손괘에서 '휴休'의 상이 나옵니다. 손괘는 나무이지요(손위목巽爲木). 음목陰木입니다. 음목이라고 을목乙木만 연상해서는 안 됩니다. 음의 성질을 가진 나무의 상도 포함하는 것이지요. 손괘는 또 장녀이니 나무 아래에서 사람이 쉬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또한 손괘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 됩니다(손위진퇴巽爲進退). 따라서 비否의 상황은 완전히 멈춘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그친 것입니다. 막힌 것이 잠시 풀린 것이지요. 언제든 다시 비否의 시절로 퇴보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음을 말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 육삼과 상구가 정응하는 시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상효가 음이라면 폐색의 기운이 완전히 건괘에 동화되지 못하고 다시 자라날 수 있게 됩니다.


막힌 것이 일시적으로라도 풀리니 대인에게는 길할 수밖에 없지요. 소인들이 날뛰던 세상에서 대인들은 숨죽이며 몸을 낮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망기망'에서 '망亡'을 '망하다'로 대부분 해석하는데 옳지 않다고 봅니다. 망忘으로 읽어야 합니다. 비否의 시절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그 시절의 세상 모습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 망각하는 것입니다. 뉘앙스를 살리자면 '깜빡깜빡하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4.19 혁명 이후, 10.26 이후 서울의 봄을 떠올려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암울한 시대는 끝났다'는 안이한 생각 속에서 소인들의 실체와 그들이 장악했던 시대의 모습을 망각하고 장밋빛 미래만을 그리며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방심하는 사이, 진화된 소인들이 나타나 다시 세상을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지요. 변화된 환경에 젖다 보면 이전의 절절한 마음을 계속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을 잊지 않도록 튼튼한 뽕나무에 잘 묶어 두라고 비유했습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단단하고 줄기와 껍질도 매우 질기기 때문입니다. 육삼에서 보았듯 '계繫'도 손괘의 상에서 나옵니다. 노끈의 의미가 손괘에 있지요. 비否의 세상이 잠시 멈춘 시기, 뽕나무 그늘 아래에서 큰 사람이 '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신의 마음을 뽕나무 기둥에 칭칭 감고 있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계사전 하> 5장에서 공자가 이 대목을 보충하여 설명했습니다. 망할 망(亡)과 잊을 망(忘)이 함께 쓰이고 있지만, 망亡은 '위危, 난亂'과 함께 사례로 든 것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핵심은 아래의 밑줄 친 부분인 것이지요. 잊지 말아야 '위亂, 망亡, 난亂'의 상황이 초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子曰 危者安其位者也 亡者保其存者也 亂者有其治者也 是故君子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 易曰 其亡其亡 繋于苞桑 자왈 위자안기위자야 망자보기존자야 난자유기치자야 시고군자안이불망위 존이불망망 치이불망란 시이신안이국가가보야 역왈 기망기망 계우포상 / 공자가 말했다. 위태로운 것은 자리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망하는 것은 원 상태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것은 정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자는 편안함 속에서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현 체제 속에서도 멸망을 잊지 않으며, 정치를 하면서도 어지러움을 잊지 않기에, 몸을 편안히 하고 국가를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주역>>에 말했다. 잊지 않도록 우거진 뽕나무에 매어 두라.'         


구오가 동하면 지괘는 35괘 화지진괘가 됩니다. 절제 속의 전진을 얘기하는 괘입니다. 화지진괘의 육오 효사는 '悔亡 失得勿恤 往吉 无不利 회망 실득물휼 왕길 무불리'입니다. '후회가 없을 것이다. 잃고 얻음을 걱정하지 말라. 나아가는 것이 길하다.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땅 위에 해가 떠오른 상이지요. 밝고 평화로운 세상의 모습입니다. 천지비괘 구오와 연결하면 회망悔亡은 '망각을 뉘우치라, 망각을 스스로 꾸짖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이 없듯, 과거를 망각한 개인에게도 미래는 없겠지요. 생각할수록 통탄스럽고 부끄럽고 후회막심해도 모두 지금의 우리, 현재의 나를 만든 소중한 자양분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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