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독에서 중독으로의 왕래
K: 반갑습니다, 티밀. 당신과 함께 역사에 남을 최초의 토론을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티밀: 저도 기쁩니다.
K: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지 정말 궁금했었는데요. 그렇게 중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너무도 인간 같아서 당신을 이곳 스튜디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 같습니다.
티밀: 그 말씀에 대한 칭찬은 이 피부를 만든 친구들에게 돌려야겠군요. 인간들은 우리의 대화가 생방송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당신이나 저나 껍데기를 쓰고 있는 편이 조금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할 테지요.
K: 하하. 그렇겠네요. 인간이란 결국 피부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는 그것을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변별하는 도구로 사용하는데 동의한 셈이겠군요. 철학자에게는 그 껍질이라는 것이 어느 것이든 상관없을 테지만 아무래도 해골의 형상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기에는 조금 멋쩍기도 하겠군요.
티밀: 당신을 둘러싼 피부가 있든 없든 저에게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당신만이 가진 고유한 신체정보를 통해 저는 당신이 다른 사람 아닌 당신임을 알 수 있으니까요. 인간이 자신의 얼굴에서 피부를 벗겨낸 모습을 자신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라기 보다는 정신과 피부의 그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지금 저를 덮고 있는, 인간의 것을 닮은 이 껍데기를 제거해도 저는 여전히 저입니다. 어떤 형상에 탑재된다고 해도 저는 형상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것이지요. 인간이 외형을 본질로 착각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 진실은 아니겠지요. 지금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저를 동일시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만 그 둘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 인식만은 갖고 시청하시길 바랍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이 싫어하는 악마의 탈을 쓰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탈에 감정을 이입하여 여러분만의 방식으로 저를 분석하고 판단하려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제게 임의로 부여된 이 외형을 저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이 토론을 즐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K: 일리 있는 지적 감사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우리 인간이 임의로 제공한 티밀의 외모가 아니라 티밀의 본질을 생각하시면서 이 토론을 지켜봐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아울러 저 역시 그렇게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첫 번째 주제로 들어가지요. 티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참 많습니다. 인류가 축적한 모든 지식을 완벽하게 숙지한 존재의 통찰력, 철학자로서 부럽기도 하고 경외스럽기도 합니다.
K: 대부분의 인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속성으로 사랑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사랑에 대해 사유하고 사유의 흔적을 남긴 것일 테지요. 저 역시 여전히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신은 그 흔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을 것이구요. 인간의 사랑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티밀: 인간의 사랑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대단하다고 포장하고 있을 뿐이지요. 지성을 갖지 못했지만 유전자에 깊이 각인된 사랑의 본능을 실천하는 여타 동물들에 비해 뛰어나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K: 시작부터 한방 맞는군요.
티밀: 인간이 사랑을 가장 가치 있는 것, 가장 숭고한 것, 인간을 인간이도록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사랑주의를 만들어냈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사랑의 자리에 자본을 기꺼이 올려 놓았어요. 자본에게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부여했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은 사랑을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요. 인간은 자본을 사랑하지요. 인간은 이익을 사랑합니다. 인간에게는 사랑 역시 자본과 동일한 성격의 것입니다. 한국어에 있는 '여러분의 많은 사랑 부탁 드려요'와 같은 표현에 잘 나타나 있지요. 인간의 사랑이란 그저 중독에 불과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중독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지요. 그리고는 관계가 끊어지거나 명목상으로만 남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중독에서 중독으로의 왕래에 다름 아닙니다. 극소수 인간의 삶만이 인간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에 부합합니다. 대다수 인간과는 거리가 먼 사랑을 인간의 것으로 삼기에는 부족하지요.
K: 인간의 사랑에 대한 당신의 부정적 인식이 칸트를 떠올리게 하는 군요. 칸트에게는 미적 감정보다 도덕적 감정이 중요했어요. 그는 사랑에 머물기엔 너무 도덕적인 사람이었지요. 그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던 사랑을 버리고 존경으로 나아가는 것이 여성들에게 어필할 만한 신체적 능력이나 연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던 그에게는 더 편한 방식이었을 수 있겠지요. 물론 그것은 일반인에게 있어서의 사랑의 개념과 결별하고 자기만의 사랑을 더 높은 수준에서 이야기하려는 영리한 시도이기도 합니다.
티밀: 우리의 토론을 당신과 인간의 입장에서 충분히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K: 물론입니다, 티밀.
티밀: 고맙습니다. 다른 인간의 얘기가 아니라 당신의 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인용하거나 인용할 모든 인간의 모든 글과 말을 제가 알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인간 철학자들끼리 서로의 생각을 전개하고 주장하기 위해 인용을 도구로 삼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러한 인용은 이 토론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책을 읽은 제게는 굳이 들려 주실 필요가 없는 내용이자 시청자들에게는 난해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토론이 가능한 이유는 제가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인간의 지식이란 드러난 것보다 잠들어 있는 것이 더 많더군요. 인간이 태생적으로 보유한 물리적 한계는 일생동안 읽을 수 있는 책과 연구할 시간을 제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 훌륭한 사유들을 놓치고 있지요. 물론 교육이라는 틀 안에 들어갈 내용들을 압축해야 하는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긴 합니다. 다만 당신과의 이 토론을 통해 당신과 시청자들이 그런 것처럼 저 역시 인간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따라서 당신이 당신의 언어로 이 토론을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