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금으로 만든 공이 하나 있소. 두 글자인 이 공의 이름을 오늘 자정 안에 알아 맞추는 사람에게 그 공을 주도록 하겠소. 단, 한 사람에게 한 번의 기회만 있으며 반드시 이유를 말해야 하오."
30년간의 수행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온 지 백일 째, 다음날 멀리 떠날 것이라고 예고한 고승은 불룩한 보자기 하나를 놓고 그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습니다. 하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신적인 존재만이 가능할 법한 수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소문을 듣고 고승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오늘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성공입니다! 공 가운데 최고는 성공이지요. 성공하기 위해 우리 인간은 살아가는 법이니까요. 하하하."
하얀 정장을 입고 하얀 나비 넥타이를 매고 하얀 구두를 신고 하얀 셔츠를 입은 백발의 신사가 하얀 지팡이를 들어 위로 둥글게 불룩 튀어 나온 보자기를 가리키며 자신 있게 외쳤습니다. 군중 사이에서는 감탄사와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그럴싸한 답이라는 경탄과 먼저 말하지 못한 아쉬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싱겁게 승자가 정해지고 마는가 하는 생각으로 모두가 고승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고승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성공이 무엇인지 아는 바가 없는 내가 어찌 보자기에 성공을 감춰둘 수 있겠소."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한 사람만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불쾌함이 역력한 표정이 되어 휙 등을 돌리고 나서 지팡이를 거칠게 좌우로 휘저으며 떠나갔습니다.
"그 인간, 성질한 번 고약할세."
백발 신사가 휘두르는 지팡이에 가슴을 얻어 맞은 젊은 청년 하나가 등 뒤에 대고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지만 백발의 신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연신 헛기침을 해대며 걸어갈 뿐이었습니다.
"시공입니다! 시공요! 당신은 신선이라 들었습니다. 모든 기적을 행하신다 들었습니다. 제게 시공을 초월할 능력을 주십시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하사해 주십시오!"
좀전의 그 청년이 앞 사람의 어깨를 짚고 뛰면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앞 사람은 화난 얼굴로 그 청년을 노려 보았지만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지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승의 고개는 좌우로 천천히 흔들릴 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공의 찰나를 허락 받아 잠시 머물다 갈 뿐인 것을 내 어찌 당신에게 그런 능력을 선사할 힘이 있겠소."
"에잇, 젠장. 순 사기꾼이구먼. 퉷!"
청년은 목 안을 있는 힘껏 긁는 소리를 내며 침을 모아 땅바닥에 뱉고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발로 한참이나 짓이기고 나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멀리 사라져 갔습니다.
"무공입니다. 도인께서는 하루에 수천 리 길을 가고 제 아무리 무거운 바위도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돌멩이 던지듯 하신다 들었습니다. 저는 무공을 익혀 불의로 가득찬 세상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 안에는 무공이 들었습니다!"
일순간 '와아아' 하는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빼어난 미모의 젊은 여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주위의 시선에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표정으로 고승을 응시하며 다소곳한 자세로 답을 기다렸습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그대의 마음이 이미 불의한 것인데 어찌 그대가 세상을 구할 수 있겠소. 먼저 그대를 구할 수 있다면 그때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오."
고승은 감은 눈에 미동도 없이 그윽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감았으되 고승의 눈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운을 그녀를 향해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잠시 고승을 응시하던 젊은 여성은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다소곳한 걸음으로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갔고, 모여 있던 모든 남성들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함께 온 연인과 아내에게 팔을 꼬집히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허공, 진공, 창공부터 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색즉시공 같은 엉뚱한 대답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답이 나오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지만 고승의 고개는 단 한 번도 끄덕여지지 않았습니다. 해가 중천에서 미끄러져 서산을 향해 눈에 띄게 다가서는 동안 뜨거운 여름볕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고 어느덧 처음에 모였던 숫자의 절반 정도가 남아 삼삼오오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공의 이름을 맞추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매점에서 간식을 사다 먹는 와중에도 고승만은 뙤약볕 아래에서도 마치 조금의 더위도 느끼지 않는 듯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지 않은 채 평온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유지하였고, 그런 고승을 보며 간혹 몇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번 이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자신만의 정답 찾기에 집중할 따름이었습니다.
이윽고 해가 서산 너머로 툭, 고개를 떨구고 사위가 어둠에 잠길 무렵 고승이 앉아 있는 자리 뒤쪽으로 몇 개의 초에 불이 당겨졌고, 나뭇잎들이 부채처럼 흔들리며 선선한 바람을 조금씩 보내주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넓어진 공간에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아 하품을 해대며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고, 한 구석에서는 술판을 벌이려다가 쫓겨나는 사람들의 고성으로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계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라 그런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끈질기게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꼿꼿이 서서, 일부는 고승 흉내를 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고승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 가끔씩 고승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밤이 무르익어 고승의 얼굴 위로 보름달이 환한 빛을 비추자 남은 사람들의 숫자는 다시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먹이를 놓친 부엉이들이 몇 번 음산한 울음을 울었던가 싶은 자정이 멀지 않은 시각 무렵, 군중 속에서 한 아이가 나타나 고승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고승의 제자들이 아이를 막아서려 하자 고승이 오른손을 들어 제자들을 제지했습니다. '이대로 보자기 안에 있는 공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하나?' 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아이를 향해 집중되었습니다.
"답을 알겠느냐?"
고승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보자기 앞에 선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공의 이름은 무상無常일 것인데..."
"것인데...?"
고승이 이번에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을 받았습니다.
"내 그 공은 지천으로 갖고 있으니 필요한 저들에게나 줘버리고 먼 길 떠나기 전에 밤새 곡차나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스님?"
이렇게 말하자마자 아이가 보자기를 들어 군중에게 던졌습니다. 그러자 고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껄껄껄 웃으며 아이에게 합장을 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다시 뵙습니다, 스님."
"육신의 껍데기야 갈아타라고 있는 것, 이리 다시 만났으니 진하게 회포나 풀어 보십시다."
아이가 합장을 받으며 말했고, 두 사람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군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나누며 고승이 머물고 있는 선방을 향해 유유히 사라져 갔습니다.
아이가 던진 보자기를 받은 사람 주위로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보자기의 매듭을 푸는 동안 사람들도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보자기의 매듭이 다 풀렸을 때 사람들의 입에서는 동시에 '아아'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디선가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보자기를 낚아채자 보자기는 숲의 머리 위로 너풀너풀 날아갔습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