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II

by 오종호

사전연락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미국 지사에서 돌아온 영진을 아내는 마치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돌아오는 남편을 대하듯 담담하게 맞이했다.


- 어서 오세요, 그 동안 수고했어요.


아내는 3개월 전에 일을 정리했다고 말했다. 아내의 눈에는 예전처럼 졸음이 배어 있지 않았다. 아내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영진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아내는 귀국 후 친한 후배 두 명과 함께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소위 영어방을 오픈했다. 결혼 1년 전의 일이었다. ‘영어연수를 떠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정통 유학파들의 네이티브 잉글리쉬’를 슬로건으로 하여 자녀에게 해외연수나 조기유학의 기회를 선물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부모들의 불안한 심리를 공략했다. 아내의 거침없는 실행은 삽시간에 동네 아파트 우등생 엄마들의 열렬한 참여를 이끌어냈고 이웃 아파트들로 입소문이 퍼져 갔다.


아내는 부유한 집에서 자란 사람답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법이 없었다. 뭘 해도 잘 될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설사 잘 되지 않더라도 경험을 밑천 삼아 재도전하면 성공확률을 높여갈 수 있다는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연애시절, 선배의 소개로 만났던 아내는 장인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요. 도전하고 또 도전해야 해요. 그게 남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거든요. 실패는 끝이 아니라 매번 성공에 가까워지는 새로운 시작이에요.”


딸의 실패에 대한 장인의 아름다운 독려는 그러나 영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장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했다. 가장은 안정적인 수입을 오랫동안 창출하는 것이 최고라고, 가장이 자기 역할을 수행해야 가정이 화목하고 자녀들이 걱정 없이 자기 꿈을 향해 갈 수 있다고. 아내는 아이를 갖기를 바라는 시부모의 말보다는 여자도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것을 위해 자기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기에 마음이 진정으로 아이를 원하는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친정 부모의 말을 따랐다.


영진이 일찍 퇴근해서 들어간 날에도 아내는 11시가 넘어서야 수업을 마치고 귀가했고 씻는 둥 마는 둥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토요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수업은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끝나기 일쑤였다. 일요일에 아내는 잤다.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사람처럼 식욕과 배설욕을 망각하고 수면욕에 침잠했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영진이 차려 놓은 저녁밥을 먹으며 아내는 벌 수 있을 때 왕창 벌어 놓고 푹 놀면서 행복하게 살자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다만 아내의 말에는 얼마를 언제까지 벌어야 하는지가 늘 빠져 있었다. 영진은 아내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남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기에게 성공이란 무엇인지.


세 번째 데이트에서 아내는 영진의 엘리트다운 멋스러움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일류대학을 나와 이름난 대기업의 본사 기획팀에 근무하는 영진의 능력이 믿음직스럽다고 했다. 대기업 임원인 장인처럼 사회적으로 성공한 훌륭한 가장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장인과 장모도 영진을 미더워했다. 무엇보다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세 살 터울의 공무원 신분의 장남이 있다는 사실에 흡족해했다. 친정 가까이에 딸을 둘 수 있어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지방에서 조그맣게 밭농사를 하는 영진의 부모는 의사결정권이 없었다. 결혼은 그렇게 6개월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영진의 나이 33살 때였고 영진 아내의 나이 31살 때였다.


- 부부간의 사랑이란 과일 통조림과 같네. 나무에서 싱싱한 열매를 따 먹는 맛보다는 덜하지만 맛도 비슷할뿐더러 훨씬 오래가는 법이지. 연애시절과는 달리 법과 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방부제 역할을 해주거든.


결혼날짜가 정해지던 날, 장인은 영진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아내는 예전의 생활 패턴으로 바로 복귀했다. 통조림의 뚜껑을 채 따보기도 전에 영진은 부부간의 사랑이 간직하고 있던 맛을 모두 알아 버린 기분이 들었다. 영진이 회사 일에 몰두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피곤한 얼굴로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아내를 위해 꿀물을 타주거나 다리를 주물러 주는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는 것은 즐거움과 거리가 있었다.


영진은 무서운 집중력과 속도로 업무를 처리했고 성과는 탁월했다.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은 저녁에는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을 배양하기 위한 각종 온라인 교육 및 자기계발 서적에 탐닉해 들어갔다. 영진의 승진속도는 눈부셨고 동기와 후배들은 그런 영진을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렀다. 낙하산을 제외하고 서른 다섯의 나이에 기획팀장의 위치에 오른 것은 회사 창립이래 최초라고 했다. 돈 잘 버는 부인과 그런 아내가 뽑아준 외제차, 고급 아파트, 그리고 회사에서의 승승장구는 영진을 뭐하나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훌륭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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