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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Dec 23. 2021

일상의 논어 <학이學而13>-불실가종不失可宗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왈 신근어의 언가복야 공근어예 원치욕야 인불실기친 역가종야


-유자가 말했다. "믿음이 의리에 가까우면 말이 회복될 수 있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으로부터 멀어진다. 이 이치를 따르면 가까운 이들을 잃지 않게 되며 존중 받게 될 것이다."


 

'신근어의' 신의信義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용信用이나 신실信實, 신념信念이나 신앙信仰 등이 아니라 신의라는 것이지요. 믿되 이익이나 사상  여타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의리 차원에서 믿는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흔들림 없이 믿어 주는 것입니다. "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이렇게 생각해 주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바람에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 같은 것이라면, 진심과는 거리가 먼 의도된 말조차 사람들에게는 관계를 단절할 좋은 구실로 작용합니다. 토론이 언쟁이 되고 언쟁이 절교가 되는 흔한 경우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서로 간의 믿음이 의리에 바탕하고 있다면 때론 기분 상하는 말, 험한 말을 주고받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 말이 교환되기 이전의 상태를 잃지 않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이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끝내 동지들의 이름을 불었다면 그의 말로 인해 그와 동지들의 관계는 파탄 나야 정상일까요? 서로의 믿음이 의리에 가깝다면 곧 상호간의 신의가 두텁다면, 동지들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의 회복이란 이런 의미입니다. 의리로 형성된 믿음을 갖고 있다면 말로 인해 관계가 회복 불가능하게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믿음은 적어도 신의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타인에게 공손한 태도가 나쁠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다면 이익이나 권력을 탐하기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주역>> 57괘 중풍손괘 상구 효사에 '上九 巽在牀下 喪其資斧 貞凶 상구 손재상하 상기자부 정흉 / 공손하게 평상 아래에 있으면 노자와 도끼를 잃게 되니 고수하면 흉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재물과 권력에 굴종하여 숙이고 또 숙이며 비굴한 처신을 지속하는 모습이지요. 이런 계산된 공손함은 결국 치욕으로 이어지게 될 뿐이라고 유자가 얘기하고 있습니다. 탐하는 것이 없다면 예의에 준하는 공손함만을 표하는 것으로 충분하지요. 돈과 힘에 굴복하여 영혼을 팔고 위장된 굴종을 보이면 보일수록 상대의 존중은커녕 수치심을 일으키는 심한 무시와 모욕으로 돌아올 뿐인 것입니다.


인因은 '앞 구절의 내용에 의거하면'과 같은 내용입니다. 신의로 사람을 사귀고 예의에 어긋날 정도의 비굴한 처신을 할 필요없이 당당하게 산다면 주위 사람들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존중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종친宗親'이란 단어가 있지요. 임금의 친족이라는 뜻이지만 흔히 일가친척 정도의 뉘앙스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을 '친척들을 잃지 않게 되고 가주家主가 될 수 있을 것이다'와 같이 풀이해도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얻을 점은 그만큼 줄어들게 됩니다. 다만, 종宗에는 우두머리, 지도자의 개념이 있으니 '가종可宗'을 '지도자가 될 수 있다'와 같이 해석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유자의 말은 "사람들을 지키면서도 인정 받고 존중 받으려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과도 같습니다. "의리로 사귀세요. 그리고 돈과 권력 같은 대상을 매개로 한 이해관계, 거래관계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정립하세요. 그럼 서로에게 늘 당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자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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