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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Jan 14. 2022

일상의 논어 <위정爲政8>-색난色難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자하문효 자왈 색난 유사 제자복기노 유주식 선생찬 증시이위효호


-자하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기색을 살피는 것은 어렵다. 일이 있을 때 제자가 수고로움을 대신하듯 하고 술과 음식이 있을 때 선생에게 먼저 먹게 하듯 하는 것으로 효라고 할 수 있겠느냐?" 



'색난色難'은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난색難色'의 글자 순서가 바뀐 것이지요. 이어지는 문장들을 통해 우리는 공자가 이것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색난을 '자식이 부드러운 낯빛으로 부모를 섬기다'와 같이 해석하는 것은 뒤의 구절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하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공자는 제자와 선생을 끌어옵니다. 굳이 제자를 젊은이, 선생을 윗사람이라고 풀이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하와 자신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니까요. 


공자의 말은 부모를 대신해 농사를 짓고, 밭일을 하고, 장을 보고, 집안을 청소하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나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리는 것은 진정한 효와 거리가 먼 것이니 효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가 선생한테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그저 장유유서의 예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부모의 얼굴에서 기색의 변화를 감지할 정도의 마음씀씀이가 있어야 효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 담긴 걱정거리와 고민은 안색으로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얼굴과 얼굴을 자주 맞대야 하지요. 곧 눈과 눈을 자주 마주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자식들은 부모의 눈을 오래 바라보지 않습니다. 욕망을 품고 살았던 고유한 한 인간이 아니라 그저 '나'의 부모라는 고정된 틀로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자식은 자신의 세상으로부터 부모와 공감 가능한 소재를 발굴하는 번거로움의 감수를 귀찮아 합니다. 동시에 부모의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에 귀를 내어 주기 싫어하지요.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사이에 두고 진행되는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는 겉돌기 십상이지요. 따뜻하고 섬세한 감성이 요구되는 '안색 살펴 마음 읽기(色)'는 가능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의 얼굴을 맑은 눈으로 응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 안에 애정이 가득해야 하지요. 성장하는 동안 부모의 눈에서 애정 대신 기대나 질책을 읽은 자식일수록 장성해서 부모의 얼굴을 바라보기 어려운 법입니다. 부모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애정이 듬뿍 어린 눈빛으로 자식을 바라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 눈빛을 받고 자란 자식이 부모의 눈을 외면할 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물처럼 아래로 흐릅니다. 사랑이 거슬러 올라오기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자식이 저의 안색을 살피는 대신 자신의 눈을 삶과 세상을 더 넓은 시야로 조망하며 살아가는데 쓰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것이 지금을 사는 부모의 마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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