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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Mar 04. 2022

일상의 논어 <위정爲政23>-가지可知


子張問 十世可知也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可知也

자장문 십세가지야 자왈 은인어하례 소손익가지야 주인어은례 소손익가지야 기혹계주자 수백세가지야


-자장이 물었다. "열 세대의 일을 알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이어받았으니 덜고 더한 바를 알 수 있고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이어받았으니 덜고 더한 바를 알 수 있다. 누군가 주나라를 잇는 자가 있다면 백 세대의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세世는 세대世代의 개념입니다. 보통 한 세대를 30년 정도로 보니 '십세'면 300년입니다. 하지만 그냥 수백 년 정도로 보면 되지요. 곧 자장의 질문은 "수백 년 이후의 일도 알 수 있습니까?"의 뜻이 됩니다. 내용상 의문문이어야 하니 야也는 호乎의 의미로 보면 됩니다. 


언제나 새로운 시대는 구시대의 유산을 선택적으로 계승하게 됩니다. 가치 있는 것은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폐기하는 것이지요. 공자는 그런 방식으로 이어진 왕조의 역사를 면밀히 살피면 미래의 인간 사회의 모습을 추론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 앞도 내다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다소 과장처럼 들리지만, 엄밀한 역사 인식에 기반한 통찰력에 상상력을 더하고 상상을 현실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은 소수의 탁월한 사람들이 세대를 이어 해 오던 일입니다. 


하, 은, 주의 왕조 흐름을 보면서 공자에게 감각된 미래의 인간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우주의 원리가 순환과 지속임을 알았던 그에게 적어도 세계는 역사적 반복을 통해 일반 백성들에게 조금씩 더 열리는 방향으로 느리게 진보하는 것으로 통찰되었을 것입니다.         




명리학을 깊이 공부하면 인간이 왜 바뀌기 어려운 존재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운명의 이치에 눈을 뜰 때 비로소 변화의 가능성을 갖게 되는 셈입니다. 주역은 애초에 변화가 곧 진리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는 책(The Book of Changes)이지요. 


명리학과 주역은 물론 역사를 포함한 인문학 전반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무속에 의지한다고 해서 세상을 통찰하는 능력을 갖게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미래가 과거의 반복일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무속의 힘을 빌어도 역사와 국민, 그리고 하늘의 뜻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역사의 진보를 원하는 국민들이 가열차게 투표하는 한 이번 대선은 큰 스코어 차이로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공자처럼 십세, 백세 앞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해도 '일세'는 보고 가야 합니다. 우리 국민의 집단 지성은 지금의 이 나라를 결코 패망의 길로 이끌지 않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권력을 탐하는 모리배들과 그들의 최전선에서 칼춤을 출 꿈을 품고 있는 불공정하고 몰상식한 최강 빌런에게 역사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추웠던 그해 겨울에 우리가 촛불을 들었던 이유는 저런 한심한 자에게 권력을 쥐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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