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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May 31. 2022

일상의 논어 <이인里仁15>-일이관지一以貫之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자왈 삼호 오도일이관지재 증자왈 유 자출 문인문왈 하위야 증자왈 부자지도 충서이이의


-공자가 말했다. "삼아, 나의 도는 일이관지한다." 증자가 말했다. "예." 공자가 나가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뜻인가?" 증자가 말했다. "스승님의 도는 충서로 귀결된다는 것이네." 



<학이> 편 4장에서 봤듯이 증자는 공자보다 마흔 여섯 살이나 어린 제자였습니다. 따라서 문인門人은 증자가 아닌 공자의 제자들이자 증자의 도반들로 봐야 합니다. 


공자는 많은 제자 가운데 증자를 콕 집어 '일이관지'를 얘기합니다. 이것은 학문과 수양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바는 결국 하나로 압축된다는 뜻이자 동시에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었다는 의미이지요. 왜 하필 증자에게 이 말을 던졌을까요? <학이> 편 4장에서 드러나듯 증자는 날마다 세 가지 사항(충忠, 신信, 습習)에 대해 반성(삼성三省)하는 사람이었지요. 즉, 이미 충忠을 아는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유자와 함께 논어에서 자子로 불린 유이한 인물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충忠은 곧 중심中心이지요. 중용과 일맥상통합니다. 증자에게서 배운 자사가 <<중용>>을 지을 수 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恕는 곧 여심如心입니다. 타인의 마음과 같아지는 것이니 역지사지를 통한 공감과 같습니다. 충이 개인적 차원의 수양과 관계된다면 서는 충을 통해 실천되는 사회적 차원의 행동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인仁의 핵심적 행동 양식인 것이지요.   


흔히 박학다식博學多識을 유식有識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로 꿰뚫어 자신 만의 지혜로 정리하지 못하는 지식이란 죽은 것입니다. 넓은(博) 것이 아니라 얇은(薄) 앎입니다. 얇으면 얕기 쉽습니다. 그래서 천박淺薄입니다. 또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지식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번드르르한 학위와 논문, 책의 뒤에 숨은 채 세상의 불의에 침묵하는 지식인은 지식에 대한 사회적 증명을 획득하여 개인의 영달에만 사용하는 비겁한 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지식에서는 결코 진정한 지혜가 우러나올 수 없습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집단적 경험과 사고를 공유하는 소수의 검사들이 자신들의 앎과 능력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걸려 수십 년 간 피 흘리며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공든 탑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무지無知에 대해 인지認知하지 못하니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정국 운영이 펼쳐질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 준 무식한 자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감내해야 할 끔찍한 고통의 크기와 퇴행의 정도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충忠과 서恕의 의미를 모르지 않을 이 땅의 수많은 자칭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시대의 정면에서 등 돌린 채 그들의 말과 글은 무엇을 위해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까? 죽은 지식의 사회, 썩은 지식인의 시대 위에서 천박한 쓰레기 기사들만 넘쳐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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