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종호 Jun 19. 2022

일상의 논어 <공야장公冶長4>-구급口給


或曰 雍也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혹왈 옹야인이불녕 자왈 언용녕 어인이구급 누증어인 부지기인 언용녕


-어떤 사람이 말했다. "옹은 인하기는 하지만 말을 잘하지는 못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어디에 말재주를 쓰겠는가? 말솜씨로 사람들을 막으면 사람들에게 자주 미움을 받게 된다. 그가 인한 지는 알지 못하나 말재주 따위를 어디에 쓰겠는가?"  



은 논어 제 6편 <옹야雍也> 편의 주인공 염옹으로 <옹야> 편 1장에 등장하는 중궁仲弓은 그의 자字입니다. 역시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입니다.


공자의 일침은 말 그 자체를 부정하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시 교육과 정치에 있어서 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공자는 아는 것이 없으면서 마치 아는 것처럼 교묘히 재주를 부리고, 지혜롭지 않으면서 마치 현자인 것처럼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거짓을 참으로 둔갑시키면서까지 악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등의 그릇된 말하기의 폐해를 경계한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듣지 않고 무조건 반대하며 증오하는 사람들로 세상은 넘칩니다. 과거에 온갖 저주와 혐오의 언사를 남발했던 언론은 동일한 사안에 대해 긍정과 찬양의 표현으로 포장해 줍니다. 참혹한 현실의 모습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대로 언어는 세계의 한계이지만 그 이전에 존재의 한계임이 명백해집니다.  


개별적 인간의 언어는 사회 내에서 그가 차지한 위상에 따른 영향력을 행사하지요. 말이 권력이 되는 지점이자 권력이 말을 독점하려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와 사회에 넘치는 말을 살펴보면 반드시 그 시대와 사회의 권력 구조와 모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법입니다. 언어를 독차지한 집단적 인간의 욕망은 그들의 말 이면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습니다. 그 욕망의 수준 때문이 아니라 그 정도 수준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이 앞세우는 말로 인해 그들의 존재의 한계는 또렷하게 포착됩니다. 눈을 뜨기만 하면 공정 뒷면의 불공정이 보이지요. 상식 뒤에는 몰상식이, 정의 뒤에는 불의가, 민생 뒤에는 탐욕이, 애국 뒤에는 매국이, 법치 뒤에는 검치가, 진실 뒤에는 거짓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서 있습니다.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며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존재와 존재 간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존재의 한계를 확장할 때 비로소 우리도 우리의 언어로 가득 채워진 세계 내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논어 <공야장公冶長3>-호련瑚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