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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Jun 17. 2022

일상의 논어 <공야장公冶長3>-호련瑚璉


子貢問曰 賜也何如 子曰 女器也 曰 何器也 曰 瑚璉也

자공문왈 사야하여 자왈 여기야 왈 하기야 왈 호련야


-자공이 물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어떠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너는 그릇이다." 자공이 말했다. "무슨 그릇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호련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자신에 대해서도 평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위정> 편 12장에서 공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라고 규정한 바 있지요. 하지만 자공에게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는 군자는 아니다." 


이는 공자가 자공의 도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야장> 편에서 우리는 공자가 제자들 하나하나의 쓰임을 세심히 읽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자고로 스승이라면 이 정도의 식견과 제자들에 대한 애정을 겸비하고 있어야 하겠지요.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자공은 언변이 뛰어나고 정치적 식견이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을 지냈고 이재에도 밝아 공자의 경제적 후원자 역할을 수행했지요. 공자는 자공이 가야 할 길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호련'은 '오곡을 담아 신께 바치던 제기'로 호瑚는 하나라()의 것, 연璉은 은나라()의 것을 각각 지칭합니다. 나라에서 쓰는 가장 귀한 제기처럼 나라의 큰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로 자공을 평가한 것이지요. 자공의 용도는 학문과 수행의 길에 있지 않고 정경政經에 있음을 알려 준 것입니다. '불기不器'가 아니라는 말에 자공의 기분이 언짢았을까요? 그럴 리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내심을 정확히 읽고 그 길에서 최고가 될 것이라는 스승의 덕담에 자공은 큰 힘을 얻었을 것이며 스승의 혜안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그릇을 타고납니다. 그것의 쓰임의 가치를 높이고 크기를 확장하는 일은 개인의 노력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걸어갈 길의 범주는 바꾸기 어렵습니다. 모짜르트에게는 음악이, 피카소에게는 그림의 길이 있는 것이지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음악과 미술을 대체 가능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음악과 미술은 전혀 다른 상이한 범주이기 때문이지요. 


누군가는 경험을 통해, 누군가는 지성을 통해 자신의 그릇을 빚어 갑니다.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애당초 불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시행착오 속에서 성찰과 노력의 과정을 건너뛰고자 요행 부리지 않고 매순간 충실히 밟는 것이 완성을 향해 가는 여정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자의 '불기' 개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틀에 적합한 전문성을 갖추는 일에만 전념하느라 경험과 지식의 한계에 스스로 갇히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늘 세상의 다양성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극히 미미한 나의 앎을 전부로 착각하는 데서 초래되는 자기 무오류성에 빠지면 사람, 그리고 세상과의 교감 능력이 상실됩니다. 특히 리더는 반드시 '불기'여야 합니다. 그릇, 그것도 조악한 그릇이 리더가 되어 쏟아내는 말에서 우리는 날마다 우물 속에 떠 있는 두레박이 바다에 대해 얘기하는 듯한 무지성과 투협妬狹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품격 있는 정치와 균형 잡힌 외교는 실종되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반목과 보복의 정치, 국익과 국민의 자부심을 내리깎는 굴종과 만용의 외교가 대체하는 중입니다. 경제 위기는 심화될 것이며, 전쟁 위기는 고조될 것입니다. 국론은 분열될 것이며, 갈등은 증폭될 것입니다. 국격은 추락할 것이며, 민격民格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통과해야 할 시대의 시행착오의 터널입니다. 요행은 없습니다. 날마다 절감하며 함께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터널 안에서 무지성의 국민들이 빛이 없는 세상의 절망에 대해 비로소 눈 뜰 수 있다면 그런대로 이 시대도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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