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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Jun 27. 2022

일상의 논어 <공야장公冶長12>-득이문得而聞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자공왈 부자지문장 가득이문야 부자지언성여천도 불가득이문야


-자공이 말했다. "스승님의 문장은 얻어들을 수 있었지만 스승께서 성과 천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얻어들을 수 없었다."



<<중용>>은 다음 구절로 시작합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 하늘의 명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 오욕과 칠정에 얽매이지 말고 우리에게 내재된 하늘의 본성을 깨닫기 위해 바르게 공부하고 수양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태도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性은 천명天命이고 이는 하늘의 이치와 같으니 천도天道란 하늘의 이치를 실행하는 하늘의 법칙인 것이지요. 천명과 천도를 알면 하늘이 인간에게 바라는 바를 이해하고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어긋남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주역>>25괘 천뢰무망괘天雷无妄卦에서 말하는 무망의 도와 연결됩니다. 인간이 본성을 회복하면 망령됨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요 이때의 본성이란 곧 천명을 뜻합니다. 천뢰무망괘의 <단전>에서 공자가 천명을 적시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지요.     


인仁으로 대표되는 공자의 유가적 가르침으로도 자공은 충분히 지혜로울 수 있었습니다. 지智의 자공이니까요. 하지만 공자가 주역 연구를 통해 깨달은 천명과 천도, 그리고 운명의 실체를 접했을 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진리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늘과 운명의 실체를 지각하게 되면 인간과 세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위의 구절을 무미건조한 사실에 대한 서술이라는 겉모습으로만 읽으면 안 됩니다. 저는 '득이문得而聞'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말 그대로 '얻어듣다'의 뜻이지요. 곧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전해 듣는 것입니다. 즉 공자의 유가적 가르침은 직접적인 제자들이 아니더라도 입과 입을 통해 이것저것 얻어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성과 천도에 대한 가르침은 소수의 특별한 제자들만이 배울 수 있었고 그 내용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명리학을 제대로 익혔다면 미래에 다녀올 수 있는 타임머신을 보유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이 내려 준 소명을 이해하고 그것을 미래지향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개발하고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미래지향적이라는 말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시행착오를 극소화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아울러 자신에게 불리해도 타인에게 이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지요. 이것이 명리학의 활인活人 정신입니다. 주역을 공부하면 인간 세상에 작동하는 하늘의 실체를 매순간 경외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자체가 인仁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요. 


하늘이 운명을 설계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며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그릇되게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명과 천도를 어기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현대의 지도자란 하늘을 대신하여 나라에 천도를 구현해야 할 의무를 부여 받은 자와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지요. 자신의 권력 유지와 소수 만의 이익 보장을 위해 대다수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지도자는 천명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자 선생의 길 위의 학당이 주나라의 정치와 문화 재건을 위한 인재 양성소 차원에 머물렀다는 오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공자가 누구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천착했음을 그의 십익十翼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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