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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Jun 29. 2022

일상의 논어 <공야장公冶長14>-불치하문不恥下問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자공문왈 공문자하이위지문야 자왈 민이호학 불치하문 시이위지문야


-자공이 물었다. "공문자는 어떻게 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요?" 공자가 말했다. "영민하면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공문자는 위나라(衛)의 대부로 <<춘추좌씨전>>에 그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공의 질문은 공문자에 대한 세상의 평판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지요. 당시 시대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나라의 태숙질大叔疾은 명문 태숙씨 가문의 종주로서 송나라(宋) 가문의 여자와 결혼합니다. 이때의 위나라 왕은 위령공으로 <팔일> 편 13장에서 봤듯이 그의 부인 남자南子와 대부들 간에는 알력 다툼이 한창이었지요. 송나라 사람인 남자가 송나라 시절 정분을 나누었던 송조宋朝를 그리워하자 위령공은 위나라로 그를 불러들입니다. <옹야> 편에서 공자가 '송조지미宋朝之美'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이니 대단한 꽃미남이었던 모양이지요. 아마도 위령공은 남자에 의해 톡톡히 가스라이팅 당했던 듯합니다.       


남자는 끼와 야망이 다분했으니 위령공에게 송조를 불러 달라 하고 정치에도 참여했겠지요. 그 끼는 공자에게도 미쳐 역시 <옹야> 편에서 공자가 남자와 만났다는 사실을 접한 자로에게 공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자견남자 자로불열 부자시지왈 여소비자 천염지 천염지 / 공자가 남자를 만나자 자로가 좋아하지 않았다. 공자가 맹세하며 말했다. "내게 잘못된 점이 있다면 하늘이 벌할 것이다 하늘이 벌할 것이야."


위령공이 죽자 남자를 축출하려다 실패하여 국외로 망명한 태자 괴외蒯聵 대신 그의 아들 출공出公이 권좌에 오릅니다. 출공은 송조를 송나라로 쫓아 버리지요. 태숙질의 부인이 바로 송조의 딸이었으니 태숙질의 입장이 난처했겠지요. 이때 공문자가 태숙질에게 얘기합니다. "자네의 운신의 폭을 넓히려면 부인과 갈라서게. 그리한다면 내 딸을 주겠네." 공문자의 말을 따라 태숙질은 본부인을 버리고 공문자의 딸 공길孔姞과 재혼합니다. 하지만 태숙질의 마음엔 전처도 아니고 공길도 아닌 전처의 동생에게 있었습니다. 처제를 사랑한 형부인 셈이지요. 처제에게 집을 얻어 주고 몰래 두 집 살림을 하던 사위 태숙질의 행각은 공문자에게 발각대고 맙니다. 


노한 공문자는 태숙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공자를 만나 의견을 구하지만 공자는 그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태숙질이 송나라로 달아나자 공문자는 태숙질의 동생 유와 딸 공길을 결혼시켜 버립니다. 어메이징한 인간사가 아닐 수 없네요. 이 일을 계기로 공자는 5년 정도 머물렀던 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갑니다.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아마도 공문자는 공자의 위나라 생활의 후원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같은 공孔씨 성을 쓰기도 했고, 자공의 의문에 대한 공자의 답이 공문자에게 우호적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경제적으로 보살펴 준 공문자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으니 계속 그의 곁에 머물면서 조력을 받기에는 공자의 마음이 편할 수 없었겠지요.        


딸과 사위를 둘러싼 공문자의 잡음을 들은 바 있는 자공은 그런 사람이 왜 나라로부터 문文이라는 고귀한 시호를 받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공자의 속내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겠습니다. "명문가끼리 혼맥을 형성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셈법에 따른 것이다. 그것을 바르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다. 공문자의 제안이 태숙질에게는 위나라에서 가문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 묘안이었을 것이다. 공문자가 그의 은밀한 사생활까지는 알기 어려웠겠지. 그래도 사위인데 무력으로 단죄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 그의 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가 5년간 이곳에서 무탈하게 지낸 것은 그의 덕이 크다. 내가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바로는 총명하고 영리하면서도 머리만 믿고 나태하지 않았다. 늘 학문을 가까이했고 모르는 바가 있으면 신분과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배움을 청했다. 이런 태도야 말로 문文이라고 불릴 만한 그릇임을 보여 주는 것 아니겠느냐?"    


겉으로 알려진 현상 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분을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미성숙한 자세이며 때로는 사악한 의도를 숨기고 있기까지 합니다.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받아들여지도록 의도된 기사와 보도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현실에서는 늘 깨어 있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만이 현상 이면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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