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종호 Jul 11. 2022

일상의 논어 <공야장公冶長22>-불념구악不念舊惡


子曰 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

자왈 백이숙제불념구악 원시용희


-공자가 말했다. "백이와 숙제는 옛 잘못을 괘념치 않았기에 원망하는 일이 드물었다." 



'원시용희'는 '시용원희 / 이에 원망을 씀이(원망함이) 드물었다'에서 원을 강조하고자 도치시킨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원망의 주체가 바뀔 수 있지요. 즉, '사람들이 백이와 숙제를 원망하는 일이 드물었다'와 같이 해석하게 됩니다. 저는 원의 주어를 백이와 숙제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고죽군孤竹君 영주의 아들인 백이와 숙제는 부친이 죽자 서로 군위를 양보하며 나라를 떠나 버립니다. 그 후 희창姬昌(문왕文王)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의탁하고자 찾아가지요. 그런데 이미 문왕이 죽은 상황이었습니다. 무왕武王이 문왕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치려 하자 백이와 숙제가 막아서며 간언합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孝라 할 수 있습니까? 신하가 되어 임금을 죽이는 것을 인仁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무왕이 둘의 뜻을 물리자 신하들이 두 형제를 죽이려 합니다. 강태공이 "그들은 의인이다"라고 말하며 보내 주지요. 그 길로 수양산에 들어간 두 사람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 굶어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사마천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사기열전』의 첫 편을 할애하여 다뤄 줍니다(백이열전). 사마천은 백이, 숙제와 같은 선하지만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사람들과 도척과 같은 악인을 대비하여 세상의 덕이나 하늘의 도라는 것이 과연 옳은 지 묻지요. 


<<주역>> 36괘 지화명이괘地火明夷卦 초효는 백이, 숙제를 주인공으로 합니다. '初九 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초구 명이우비 수기익 군자우행 삼일불식 유유왕 주인유언 / 밝음이 상하니 날고자 해도 날개가 기운다. 군자가 떠나고자 하여 삼일을 먹지 않은 채 나아가니 주인이 나무랄 것이다.' 공자는 <소상전>에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象曰 君子于行 義不食也 상왈 군자우행 의불식야 / 군자가 떠나고자 하는 것은 의리상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구악'은 타인의 잘못과 그로 인해 품게 되는 개인적 원한을 아우릅니다. 이를 마음에 두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것은 성인의 성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으므로 부지불식간에 과오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과실을 인식하게 되면 반성하여 바로잡을 수 있는 본성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 사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 수준이 높으니 그에 비추어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높이 사는 것이지요. 과거에 큰 상처를 주었던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현재의 그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성숙되지 않으면 진심 어린 사과란 애초에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런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타인을 원망하는 일이란 좀처럼 발생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잣대로 사용합니다. 자신이 옳았고 상대가 틀렸다고 규정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을 수정하기 싫어합니다. 불편함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늘 제자리 걸음만 할 뿐입니다.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유사한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이고 그 한계 앞에서 등을 돌리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이야말로 흔히 볼 수 없는, 그릇이 성장하는 사람인데 그들을 외면하면 주변에 큰 그릇의 사람들을 두기 어렵게 되고 맙니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하나라(夏)의 걸桀과 함께 걸주桀紂라고 불릴 정도로 폭군의 대명사입니다. 썩은 가지를 쳐내야 나무가 더욱 튼튼하게 자라듯이 국민을 불행하게 하고 나라를 망가뜨리는 리더는 제거되어야 마땅합니다. 비록 논어 곳곳에서 공자가 백이와 숙제를 칭찬하고 있지만 국민 주권 시대인 오늘날 부패하고 사악한 정치 세력을 일소하는 혁명은 위대한 일입니다. 정당성을 갖춘 혁명을 효孝와 인仁을 내세워 막아서고 뜻이 수용되지 않자 굶어 죽기를 택한 백이와 숙제의 한계는 시대의 한계이지요. 안타깝게도 그 한계는 이 시대에도 유효합니다. 여전히 주인 담론主人談論에 지배된 채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망각하고 역사를 퇴보시키는 어리석은 주권 행사를 하는 국민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불필요한 시행착오의 자초를 반복하는 개인을 슬기롭다고 말할 수 없듯 겪지 않아도 되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는 선택을 주기적으로 거듭하는 국민을 현명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 차원에서는 타인의 성장을 인정할 줄 아는 그릇을 갖춰 가되 정치 사회적으로는 결코 선하게 바뀔 수 없는 집단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우리의 미래에서 그들을 깡그리 제거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깨시민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논어 <공야장公冶長21>-광간狂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