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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Aug 18. 2022

일상의 논어 <옹야雍也27>-민선구의民鮮久矣


子曰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자왈 중용지위덕야 기지의호 민선구의


-공자가 말했다. "중용의 덕 됨이 지극하건만 사람이 적어진 지 오래구나."



이 구절은 <<중용>> 3장의 내용(子曰 中庸其至矣乎 民鮮能久矣 자왈 중용기지의호 민선능구의)과 대동소이합니다. 


논어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공자가 인仁에 대해 책정한 수준이 너무 높다는 인상을 받게 되지요. 물론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군자가 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민중이 이해하기 쉽고 실천하기 용이한 개념일 때 철학적 가치의 현실적 구현이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민중의 군자화'가 아니라 '민중의 군자 판별 능력 구비' 차원에서 훨씬 중요한 의미를 띱니다. 무자격자, 무능력자들이 득실거리는 우리 정치판만 봐도 성인들의 깨달음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민중의 각성으로 오롯이 연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과 각성의 매개 수단인 교육의 실패가 반복된 탓이 큽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중용의 개념을 일상적 실천이 가능할 정도로 단순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사람의 관심은 금방 멀어지는 법이니까요.  


중中은 뚫을 곤(丨)과 가운데 중(中)의 합자입니다. 뚫을 곤(丨)이라는 글자는 하늘에서 땅으로 곧장 내려온 형상입니다. 하늘의 이치가 고스란히 땅으로 전해진 것이지요. 그 이치는 사람의 입(口)을 통해 땅에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말이란 항상 하늘의 이치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서 중도中道란 곧 하늘의 길입니다. 중도의 실천이란 인간이 어느 영역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든 하늘의 이치에 위배되지 않도록 말하고 행하는 것이 되지요. 


<<중용>> 1장에서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 - 희노애락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 한다'고 한데서 중中이 하늘의 이치임이 명백해집니다. '發而皆中節 謂之和 발이개중절 위지화 - 발현되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한다'고 했으니 인간은 화和를 통해 하늘의 중中을 땅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기쁠 때 기뻐할 줄 알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알며, 슬플 때 슬퍼할 줄 알고, 즐겨야 할 때 즐길 줄 아는 것'은 인간의 본성처럼 느껴지기에 쉬운 것 같아도 정도에 알맞게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입니다. 고통스럽게 숨져 간 국민들의 생의 마지막 공간인 반지하방 앞에서 우리는 슬퍼해야 할 때조차 슬퍼할 줄 모르는 리더의 무감정을 확인하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했지요. 불의에 노여워하며 떨쳐 일어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분노의 표출을 억압하는 폭력에 대한 공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락樂은 질투와 시기의 감정, 쾌락의 향유와 중독으로 각각 전이되기 쉽지요. 


庸은 '일정하여 변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곧 한결같음의 개념이지요. 庸은 경庚과 용用의 합자입니다. 경庚이란 일곱 번째 천간으로 오행적으로는 양금陽金입니다. 경금庚金은 화기火氣의 단련을 받아야 귀물貴物이 되기에 경금의 입장에서는 화기에 철저히 순응하고 따라야 합니다. 쇠가 용광로에 제련되는 것이요, 열매가 햇빛을 받아 단단하게 익어 가는 것입니다. 이를 종從이라 합니다. 따라서 庸이 뜻하는 한결같음이란 변화를 거부하는 완고함과 고루함이 아니라 변화를 수용하며 진보하는 개념입니다. 본질적 가치는 유지하면서도 동시대의 정신과 사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포용하며 때에 부합하는 종시從時의 속성을 갖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끊임없이 부르짖고 있는 '자유'가 아무런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생뚱맞게 들리는 이유는 그 단어가 종시從時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용>>에서는 지극한 정성(至誠)이야말로 인간이 쉼 없이 기울여야 할 노력의 실체로 드러나며, 그것은 때에 맞게 해야 한다고(時措之宜시조지의) 강조합니다.  


정리하면, 우리 민중의 입장에서 중용中庸이란 '하늘의 이치를 땅에 조화롭고 시의적절하게 구현하는 인간의 정성스러운 태도와 절도 있는 언행'으로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억압하고 죽이는 일 대신 살리고 기르는 일(생生, 육育, 활活, 양養 등)에 힘쓰고, 사적 이익을 탐하는 대신 더불어 이로움을 누리는 일(시施, 분分, 여與, 동同 등)에 애쓰는 것이지요. 그럴 때 사람은 점차 인仁해지고 세상은 의義롭게 되니까요. 


중용의 덕이 지대한데 중용의 삶을 사는 이들이 드물어진 지 너무 오래되었다고 탄식하는 공자의 심정을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 수십 일 만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의不義해 질 수 있는지 우리는 생생하게 느끼고 있지요. 인간의 지성知性이란 믿을 게 못됩니다. 민중의 감성感性이 중용에서 벗어난 위정자를 더는 용납하지 못하는 순간에 이를 때, 세상은 다시 뒤집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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