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종호 Sep 06. 2022

일상의 논어 <술이述而16>-오십이학역五十以學易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자왈 가아수년 오십이학역 가이무대과의 


- 공자가 말했다.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이 주어져 쉰 살에 했던 것처럼 역을 공부할 수 있다면 큰 허물은 없을 텐데..."



이 구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크게 세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오십이학역'을 '오십이 될 때까지 역을 공부할 수 있다면'으로 푸는 것이며, 둘째, '我數年 以學易 가아수년 졸이학역'이라고 고쳐 읽어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을 빌려 주어 역 공부를 마칠 수 있다면'과 같이 풀이하는 것, 셋째 '五十以學 易可以無大過矣 오십이학 역가이무대과의'로 끊어 읽어 역易을 역亦로 보고 '오십이 될 때까지 공부할 수 있다면'으로 독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주역 공부를 아예 배제하는 시각이지요.  


위 구절에 대해서는 <옹아> 편 15장에서 사전에 언급한 바 있습니다. 중복되는 내용을 피해 첨언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https://brunch.co.kr/@ornard/957)


논어에 역에 대한 추가 언급이 없는 점, 논어에 담긴 귀신에 대한 공자의 부정적인 입장, 맹자가 역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던 점 등을 들어 <<주역>>에 대한 술이부작인 '십익十翼'이 공자의 저작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위의 근거들을 바탕으로 주역과 공자의 연결성을 희박하게 보며 십익의 저술 시기가 전국시대 말이라는 역사적 통설을 내세워 그 추론에 힘을 싣기도 합니다. 주역의 주변이 아니라 주역의 내용에 관심이 있는 저로서는 사실 이런 논란이 좀 우습긴 합니다. 주역이 귀신에 대한 책이 아닌데 귀신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는 대목을 드는 것은 전제의 오류이지요. 제사와 제례를 중요시한 공자는 이미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공자가 역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은 까닭은 <공야장> 편 12장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참고: https://brunch.co.kr/@ornard/927


정리하자면, 공자와 주역의 관계에 대한 논란은 소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역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학파의 연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유가의 위상을 구축하고 강화하여 전승하는데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가 내에서 주역에 대한 연구는 면면이 주희에까지 이어집니다. 


역사라는 것도 몇 권의 책에 실린 텍스트가 진실을 담보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현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영상화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메라 밖은 화면에 담기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명제와 카메라는 영상과 이미지 기저에 기획된 의도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까지 포착할 수는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 따라 여러 상반된 해석의 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실체적 진실과는 항상 일정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주역과 공자의 사이에 역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그래서 우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희씨, 문왕, 주공, 공자에 이르는 주역 텍스트의 집대성 과정을 역사와 신화의 중간에 위치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가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주역과 공자에 대한 관련성은 전문 연구자들에게 넘두고 우리는 주역 공부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낫습니다. 주역의 위대함은 공부와 활용 과정에서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위 구절에서 우리는 '오십이학역五十以學易'을 수긍 가능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직역하면 '오십으로써 역을 배운다면'의 뜻입니다. 의역하면 '오십은 한참 전에 지났고 나는 이제 늙어 심신이 쇠해 언제 떠나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손에서 주역을 놓지 않았던 쉰 살 그때의 젊음과 열정으로 다시 한 번 제대로 역 공부에 몰입할 수 있다면'의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오십'에 사로잡혀 공자가 40대 중반에 한 말이라고 보거나, 사마천의 기록에 의거하여 60대 후반에 한 말로 보아 오십이 잘못된 표기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풀이할 때 공자의 마음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전달됩니다. <<담백한 주역>>을 쓰면서 저는 공자의 마음과 만나는 느낌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이 논어에 슬쩍 끼워 넣은 문장들에게서 공자의 위편삼절과 술이부작이 사실일 것이라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인쇄 대기열에 서 있으니 늦어도 9월말이면 온오프 서점에서 <<담백한 주역>>과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논어 <술이述而15>-부운浮雲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