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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 Oct 23. 2021

시골살이의 이면

그리고 남은 이야기들

시골에서 산다고 해서 전부 귀농이나 귀촌을 한 사람은 아니다. 나 역시 처음엔 그저 낯선 동네로 이사를 한다고 여겼다. 이사 후에도 밭을 매거나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런 부지런한 삶은 애초에 꿈도 안 꿨다. 다만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벗어나 조용한 지방으로 터전을 옮겼을 뿐, 내 생활 자체가 달라지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한동안은 친한 친구들과 멀어져 외로웠고, 영화나 공연처럼 익숙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없어 불편했다.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인근의 대도시까지 차를 타고 나가야 했기 때문에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시골 한옥에서 태어난 아이는 겨울마다 볼이 빨갛게 텄다. 아무리 좋은 베이비 로션을 발라도 집안에 흐르는 한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남편은 한겨울 난롯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새벽마다 일어나 연탄을 갈았다. 여름이면 사방에서 벌레가 출몰했고, 값비싼 옷은 벌레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었다. 계절마다 넓은 마당 위로 잡초가 무섭게 자랐다. 처음엔 맨손으로 잡초를 뽑다가 결국엔 제초기를 장만했다. 로망과 달리 전원주택은 손이 많이 가는 주거 공간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일 년 동안은 모든 생활이 낯설고 불편했다.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한탄이 절로 나왔다.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조용히 글을 쓰며 홀로 고요하게 사는 삶을 꿈꿨다. 그러나 시골살이 연차가 쌓일수록 어느 곳에도 ‘홀로’ 사는 세상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속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창하게 ‘협동조합’이나 ‘무슨 단체’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소소한 모임도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낯선 외부인이 아닌, 그냥 ‘여기서 사는 사람’이 되었다.

     

어렵게 시골에 정착했지만 이룬 것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성과가 없다고 스스로 비관할 땐 긴 터널을 지나는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무사히 시골에 적응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다 사람들 덕분이었다. 내가 움츠러들때마다 그들은 무심하게 어깨를 다독이며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줬다. 큰 위안이 되었다.      


물론 시골이라고 다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성향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면 곤혹스러웠다. 익명으로 숨을 수 있는 도시와 다르게 인구가 적은 읍내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안 맞는 사람들을 마주쳐야 했다. 말이 빨리 퍼지는 작은 마을이라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무 말이나 내뱉지 못하고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했다.  


도시에서라면 뒷일이야 어찌 됐든 ‘다시는 안 본다’ 생각하고 속 시원하게 내지르면 그만이라 여겼다. 그러나 인간사, 그렇게 관계를 끊고 끊다 보면 결국 내 곁에 남아있는 이는 한 사람도 없게 된다. 지금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더라도 나중엔 어렴풋하게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변화의 순간이 오고야 만다. 시골의 소규모 직장에서 하며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해결 방식을 터득했다. 동네 사람들과 부대끼며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느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범상한 마음 이해했다. 그 과정을 통해 숨을 고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지혜를 배웠다.      


무엇보다도 자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무한한 축복이었다.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구나' 싶을 땐 혼자서 산책을 했다. 나는 습관처럼 운동화를 신고 집 앞에 있는 월출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걸었다. 산에서 풍기는 나무냄새가 불온한 나를 위로했다. 맑은 날, 비가 오는 날, 바람이 부는 날, 흐린 날, 눈이 오는 날, 날씨마다 공기의 냄새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처럼 놀라워했다. 어린 시절, 밤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아버지의 품에서 맡았던 차가운 공기의 냄새, 여름이 다가올 무렵 습기를 잔뜩 머금은 흙의 냄새도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헉헉거리면서 산길을 걷다 보면 내 숨소리와 귓전의 바람 소리만 들리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면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존재했다. 심장 깊은 곳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목구멍에 뜨거운 통로가 느껴졌다. 녹음이 짙은 저수지에 앉아 깊은 물을 내려다보면 이유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 순간에는 그토록 미워했던 내가 애틋해졌다.     


산길을 걷는 행위는 내가 영암에 와서 가장 자주 했던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나를 살리는 일이 되었다. 정신과 의사들이 우울증 환자에게 흔하게 내리는 처방 중에 하나가 ‘산책’이라던데, 그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다 이유가 있는 거였구나. 산속에서 치유를 경험하며 혼자 여러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암에서 사는 동안 남편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부부 사이가 각별해서라기보다는 낯선 타지에서 의지할 사람이 둘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습관이었다.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눈 끝에 결단을 내렸다. 남편은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한옥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나 역시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고 글을 써보자 결심했다.      


사실 그동안에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매번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좋은 소설을 쓰리라’ 굳게 다짐하고 글을 쓰려니 잘 써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잘해보자고 기합이 들어가니 부담이 밀려왔고 좋은 글을 쓰기는커녕 노트북을 열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잘 쓰자'고 하지 말고, 그냥 내가 아는 이야기를 써보자 생각을 바꿨다.      


나는 농사도 짓지 않는 한량 같은 시골 생활자였다. 귀농이 아니어도 시골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는 방법이라면 알고 있다, 자신했다. 낭만과 현실사이 어디쯤 머물면서 전원생활의 허와 실을 알게 되었고,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사는 소소한 이야기도 전하고 싶었다. 또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지기 전에 내가 경험했던 영암에서의 생활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멀리서 보면 시시한 시골 이야기지만 가깝게 들여다보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맨 처음 남쪽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영암에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잠시 살다가 거쳐 가는 임시거처쯤으로 여겼던 시골이 어느새 삶의 터전이 되었고 그렇게 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영암에서 아이를 낳은 후, 전혀 몰랐던 사람들과 인연을 쌓았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좋았던 일이 많았다.

     

우리는 올봄 정들었던 영암을 뒤로하고 새로운 둥지를 찾아 터전을 옮겼다. 어디에서 사는가 보다는 어떻게 사는 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사한 곳 역시 시골의 정취가 남아있는 지방의 소도시이다. 남편은 이곳에서 다시 한옥 강사 일을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종종 영암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 연락을 한다. 그들은 나의 평안을 빌어주고 나는 그런 그들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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