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 Jul 06. 2021

한옥에서 사는 세 마리 고양이

그 시절 나의 고양이들, 너희는 한옥에서 살 때 가장 고양이다웠어.

  우리 집에는 나와 오랫동안 인생을 함께 한 늙은 고양이 소소가 있다. 2003년생이니 노묘 중에서도 파파할머니급이다. 소소의 엄마인 밀키는 3년 전에 열일곱의 나이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소소는 다행히도 엄마 고양이보다 오래 장수하며 열여덟이 된 현재까지도 정정하게 살아있다.


   뒤돌아보면 우리 집 고양이들은 한옥에서 생애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무 냄새가 가득한 내부, 캣타워가 필요 없는 나무기둥과 대들보, 한여름의 그늘을 가려주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처마 밑, 격자무늬 창과 나무 문, 넓은 마당과 초원의 나무까지. 고양이에게 한옥집은 그야말로 최적화된 공간이다.    

   

  이사 전에는 아파트 태생의 고양이들이 시골 한옥집에 잘 적응할까 걱정이 많았다. 밀키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함부로 곁을 주지 않는 까칠한 성격이었고, 소소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도 자기 구역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겁쟁이였다. 반면 남편이 입양한 길동이는 유기묘 출신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바깥 생활을 좋아하고 산책을 즐기는 순둥이었다. 그렇게 성격이 제각각인 세 마리 고양이들은 우리의 결혼과 함께 생경한 환경의 한옥에서 합가를 하게 됐다.      


  고양이들은 이사와 동시에 완벽한 산책 고양이로 변신했다. 적응 걱정으로 전전긍긍했던 지난날이 무색하게 세 마리 모두 새로운 집에 금방 적응했다. 특히 엄마고양이 밀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밖으로 나가 마당과 집 주변을 쏘다녔다. 까칠한 성격 탓에 집 밖을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나의 편견과 달리 밀키는 매일 동네 마실을 즐기는 산책 고양이가 되어버렸다. 겁쟁이 소소는 결코 자기 구역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종일 마당에 나와 햇볕을 쬐며 행복한 뒹굴기를 선보였다. 예상치 못하게 걱정을 끼친 녀석은 남편이 키우던 길동이다. 길동이는 산책 구역이 넓어도 너무나 넓었다. 마당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이웃집 돌담이나 뒷산에 있는 대나무 숲까지 겁도 없이 돌아다녔다.  

    

  길동이는 천성이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날마다 외출 간격이 늘어 몇 시간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루 종일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는 혹시 길동이가 동네 개들한테 쫓겨 사고라도 당한 것이 아닌가 늘 조마조마했다. (우리가 살았던 시골 동네는 대로가 멀어 차량 통행이 적었고, 마을의 개들은 사람에게 달려들지 않는 순한 개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외출이 길어지면 별의별 걱정이 다 들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이 길동이를 집안에 가두고 바깥 산책을 자중시켰다. 당황한 길동이는 문 앞에서 애처롭게 울면서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울음소리를 무시하자 급기야는 앞발로 창문을 열어 탈출을 감행했다.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저러다 길동이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새로운 걱정이 들었다.


   고양이들은 한옥으로 이사 후 완전히 야생성에 눈을 뜬 것 같았다. 밀키는 생각보다 몸이 잽싸고 날렵했다. 우선 부엌 싱크대를 밟고 찬장으로 올라가 대들보까지 점프해 대들보 위를 유유히 걸어 다녔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위험하니 빨리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밀키는 높은 대들보 위에 편안하 앉아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길동이는 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고양이었다. 사람의 손길을 좋아했고 손님이 와도 하악질 한 번 없이 상냥하게 접대를 하는 '개냥이' 기질이 다분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대신 길눈이 밝은 게 분명했다. 다행히도 길동이는 밥때가 되면 어디선가 꼬박꼬박 나타났고, 하루 종일 바깥을 쏘다니다가도 잠은 집에 와서 잤다. 어느새 나는 돌아온 탕아를 맞이하는 심정으로 길동이의 방랑자 기질을 인정했다. 얼마 안 가  ‘그래, 다 좋으니 어디서 다치지만 말아다오’ 하며 산책 금지를 포기했다.     


  밀키와 길동이는 자주 생쥐나 작은 새를 잡아 와 나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녀석들은 전리품처럼 현관문 앞에 죽은 동물을 당당하게 전시했는데 그 사체를 치우는 일이 매번 고역이었다. 밀키는 가끔 풀밭에서 손가락만 한 실뱀을 입에 물고 와 가지고 놀기를 즐겼다. 뱀은 완전히 죽지 않은 채로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꼬물꼬물 몸을 비틀었다. 기절 직전의 뱀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를 발견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차마 뱀을 치울 담력이 없어 남편을 불러 뒤처리를 부탁했다.      


   어느 날에는 남편과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현관문 앞에 떡하니 죽은 꿩이 누워있었다. 나는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고 기가 막혔다. 아무리 시골 생활에 야생성이 살아났어도 얘들이 무슨 정글의 맹수도 아니고, 자기 몸집만 한 꿩을 잡아다 집 앞에 두다니. 다큐멘터리에나 등장할 일이었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앉아있는 고양이들을 쳐다봤다. (꿩아 미안.) 처마 밑에 쪼르륵 앉아 태연하게 그루밍을 하고 있는 세 마리의 고양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한옥에서 살며 고양이들은 눈에 띄게 건강해졌다. 서울의 좁은 빌라에서 자주 간질 발작 증세를 보였던 소소는 한옥으로 이사하자 발작 증상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밀키는 한옥에서 사는 동안 노년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노묘답지 않게 활력이 넘쳐 곤충과 작은 동물을 사냥하며 뛰어다녔고 한껏 동공을 확장시켜 어린 고양이처럼 새로운 세상을 탐닉했다. 길동이는 방랑자 생활을 만끽하며 어떤 고양이도 맛보지 못한 드넓은 세상을 활보했다. 살아 있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고양이로 존재했다.   


  남편은 학교에서 실습하다 남은 통나무를 가져와 마당 한쪽에 두었다. 전세로 얻은 집이라 최대한 흠집 없이 써야 하건만 녀석들은 새로 산 가구는 물론이고 나무로 된 문짝을 발판 삼아 긁어대기 일쑤였다. 긁기 쉬운 안방 문은 너덜너덜해져서 아예 새로 사주고 나와야 할 판이었다. 임시방편으로 통나무를 두어 개 실어와 고양이들의 놀이터로 내주었다. 다행히도 고양이들은 자연의 냄새가 나는 통나무를 아주 좋아했다. 통나무는 고양이들이 올라가 쉬거나 발톱을 긁는 용도로 쓰였다.  얼마나 자주 통나무를 애용했는지 나중엔 한쪽 면이 다 닳았다.  (나중에 문짝을 갈아주느라 돈이 좀 들었지만 통나무를 들여놓은 이후론 집안 물건을 긁지는 않았다. )   


 이사 후 2년,  가을쯤부터 길동이는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좋아하던 산책도 멈추고 옷방에만 웅크렸다. 나는 하루빨리 길동이가 기운을 차리고 다시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산책하길 바랬지만 길동이는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미스터리 한 일이 일어났다.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던 길동이가 어느 날 저녁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숨만 헐떡이며 모로 누운 채 시간을 보내던 녀석이 무슨 기운으로 혼자 집안을 걸어 나갔을까. 나는 길동이의 시신이라도 수습해주고 싶어 며칠 동안 길동이를 찾아 헤맸다. 오래 걸을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집 근처에서 금방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주 가던 산책길과, 뒤켠의 창고, 뒷마당의 초원, 대나무 숲까지 사방을 찾았지만 길동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병든 몸을 끌고 나가 세상에서 완벽히 사라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길동이는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아니, 마감했다고 추측할 뿐이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 자연 상태의 동물은 동료에게 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 거처를 떠난다고 들었다.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길동이는 우리에게 마지막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걸까. 그래서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집을 떠난 것일까. 길동이는 육신을 벗어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유로운 영혼으로 존재했다. 나는 길동이가 뛰어놀던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가만히 보면 고양이라는 존재는 다른 어떤 반려동물보다 야생과 가까운 본능을 가지고 있다. 유연한 몸으로 여기저기 높은 곳을 올라다니고 나무 기둥에 날카로운 손톱을 긁고 흥미로운 냄새가 있는 곳은 그냥 지나치질 않는다. 사냥감을 발견할 땐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순식간에 야성의 눈으로 돌변해 쏜살같이 달려들기도 한다. 물론 느긋한 표정으로 안락한 침대 위에서 식빵을 굽는 모습도 너무나 귀엽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은 본능을 간직하고 충만한 자연을 느끼는 고양이의 자태는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잃어버렸던 야생 본능을 깨우치고 가장 고양이다운 모습으로 살았던 그 시절, 나의 고양이들에게 고양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고 싶다. '너희는 한옥에서 살 때 가장 고양이다웠어.'  

  

이제 와 뒤돌아보니 내가 정말로 그리운 것은 지금보다 젊고 활기찼던 내 고양이들의 모습, 나보다 더 빨리 늙어버린 나의 아이들의 행복했던 시간들이다.

이전 02화 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는 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