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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Oct 24. 2022

긴 방황과 상실의 시대

애(愛)의 씨줄과 증(憎)의 날줄

문학사상 <상실의 시대> 표지 아이패드 드로잉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두 도시 이야기』의 처음에 나오는 글이다. 프랑스혁명을 전후한 시대의 질곡과 양면성을 잘 드러냈다.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늘 희망의 봄과 절망의 겨울 사이를 방황하고 있다. 개인의 삶은 그 자신으로 봐서는 혁명이다. 매 순간 선택하고 결정하고 결단한다. 그것이 잘못되면 삶은 나락으로 빠지고,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현명하게 선택했다 해도 행복과 기쁨이 영원하지도 않다. 세상은 늘 변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슬아슬하다.      


산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의 이중주다. 삶에도 명도와 채도가 있고, 흑과 백이 있다. 이들이 애(愛)의 씨줄과 증(憎)의 날줄이 되어 인생을 엮어간다. 삶이든 그림이든, 색을 더 밝고 선명하게 해주는 것은 깊은 어둠과 탁함이다. 밝음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깊은 어둠이 있어야 한다. 그렇듯 슬픔과 절망의 시간을 이겨낸 행복이 더 아름다운 법이다.      


내 사춘기 시절은 온통 우울한 청색이었다. 밝고 빛남은 흐릿하고 어둠과 우울함으로 덧칠됐다. 오렌지색 나는 밝은 빛을 찾기 힘든 시절이다. 그때부터 내면을 탐구하는 버릇이 시작됐다. 우울과 상실을 이겨내기 위한 긴 여행이 시작됐다. 말하자면, 깨달음을 위한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우정과 사랑을 통해 지독한 우울을 이겨내려 노력했다. 그 또한 정답이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 눈물을 흘리시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라고 정호승 시인이 말했다. 그러니 다들 외로운 사람이 누가 누굴 위안해 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우울은 자신만 해결할 수 있다. 우울의 근원을 찾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도 했다.     

   

붉게 타는 저 노을처럼   

독일의 문호 괴테는 "색은 빛의 행위이자 고통"이라 말했다. 색의 근원은 빛의 움직임이고 파장이다. 빛이 대기 중의 먼지나 공기에 부딪혀 부서지면서 색을 뿌린다. 파장이 짧은 파란색이 제일 먼저 고통을 참으며 파편으로 흩어진다. 파장이 긴 붉은색은 지평선 가까이 내려앉을 때쯤이면 산산이 부서진다. 져 붉게 타는 아름다운 노을은 빛의 파편이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빛의 여정처럼 삶도 부딪히고 깨진다. 그럴 때마다 형형색색의 색채를 뿌린다. 고통을 통해 성숙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만든다. 파란과 곡절을 이겨낸 삶은 저 대답 없는 붉은 노을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저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아픔 없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슬픔을 가슴에 묻고 그렇게 살아간다.     

20대 초반의 어느 가을, 해인사를 찾았다. 하룻밤을 자고 숙소에서 눈을 떴다. 새벽녘부터 비가 내렸나 보다. 창을 여니 산골에는 안개비가 내린다. 깊은 가을의 울긋불긋한 단풍들이 안개비에 촉촉이 젖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그날 안개비에 흠뻑 젖은 산을 잊지 못한다. 풍경만큼이나 내 마음도 몽환적이던 시절이다. 


내 우울함의 뿌리를 찾고, 무지함을 깨치기 위해 노력했다. 두서없이 책을 읽고 말도 되지 않는 느낌을 끄적거렸다. 20대는 내 우울과 관련한 장르만 집중적으로 편식했다. 이때 주로 마음의 위안으로 삼을 만한 심리학책을 읽었다. 심리학의 기초 지식이 없이 책을 읽다 보니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저 읽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다. 


상실의 시대     

“자기, 지금 어디 있는 거야?"하고 미도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와타나베는 혼자 생각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와타나베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계속 생각한다.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장면이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긴 방황을 끝내고 미도리에게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지금 어딨는지 모른다. 장소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상황을 모른다는 뜻일 것이다. 젊음은 늘 그렇듯 끝내 방황한다. 


우리 모두 '상실의 시대'를 지나왔다. 되돌아보면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웠고 청춘이 빛나던 시절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애틋하고 절절한 건지도 모른다. ‘상실의 시대’는 지금의 청춘에게, 또 돌아갈 수 없는 세대에게 가장 어울리는 고독과 우수를 표현한 말이다.         


시대는 암울하고 현실의 벽은 높았다. 우울과 슬픔으로 방황하던 20대였다. 청춘은 빛나지 않고 어두웠다. 아니 그때도 어른들 눈에는 분명 우리는 빛났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빈약한 오늘은 늘 허전했고,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내일은 공허했다. 막연한 희망과 냉정한 현실 사이에는 너무 큰 간격이 있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목표를 상실했고 갈 곳을 몰랐다. 고독과 우울은 산을 이루고 바다를 메웠다. 중이염은 이미 곪을 대로 곪은 터라 점점 듣는 것이 힘들어졌다. 견디다 못해 병원을 찾았다. 약을 한 가마니나 준다. 그걸 먹으면 잠이 쏟아졌다. 밥 먹고 약 먹고 잠잔다. 그러기를 한 달여지나니 살이 뒤룩뒤룩 찐다. 숨이 가빠오고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이 몰려온다.                   

 

”병 고치려다 살쪄 죽겠다. “하고 혼잣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약을 끊었다. 그게 옳은 일이 아닌 줄 알지만 거의 자포자기다. 어차피 안 될 바에는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되는 일은 없고 앞일은 막막했다. 대책 없는 청춘이라 상실했고 아파했다.    


대학 졸업반이 되자 다급해졌다. 부랴부랴 공채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지금 우리나라 최고 기업인 S그룹 공채 시험에 합격했다. 의기양양하게 임원단 면접에 응했다. 아뿔싸! 면접관인 임원들과 내가 앉은자리가 멀었다. 잘 들리지 않는다. 청력이 많이 손상된 나로서는 동문서답할 수밖에 없었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면서 취업의 꿈을 접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노랗다. 앞으로 무얼 해서 먹고사나?      

     

대학병원에서 워낙 중이염의 뿌리가 깊어 수술로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갈수록 청력은 나빠지고 귀에서는 계속 고름이 나온다. 이 일을 어떡하나? 암울했다. 공부를 계속하는 길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절박함이 밀려왔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의 길로 들어섰다. 다행히 책 보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땐 그것 말고는 내가 선택할 카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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