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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Oct 24. 2022

옛이야기

옛이야기

이준선 작가의 <산골 소년과 노신사>를 아이패드로 다시 그림

산골의 겨울 해는 늘 게을렀다. 늦게 일어나서는 일찍 서산 너머로 가버렸다. 그때는 눈이 참 많이 왔다. 겨울의 절반은 눈으로 덮여 설국이 따로 없었다. 아랫실못을 내려보는 야트막한 산기슭에는 복숭아나무가 빼곡히 자란다. 복사꽃 눈망울이 살그머니 움트면 봄이 시작된다. 


복사꽃이 활짝 피면 이산 저산은 온통 분홍색 천지다. 아랫실못의 얼음은 진즉에 녹았다. 투명한 물 위에는 어느새 흐드러지게 핀 복사 풍경화가 펼쳐진다. 가난한 산골이라 봄이 와도 살림이야 늘 옹색했다. 그렇지만 자연은 넓은 캔버스에 물감을 듬뿍 묻혀 그린 아름다운 그림을 넉넉히 선물했다. 봄날 하늘의 붓질은 늘 풍성하고 매끄럽다. 


여름이 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아침을 물리자 댓바람으로 물가로 뛰어나온 아이들은 배가 출출해져야 늦은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들어온다. 그때야 가난을 이웃하며 사는 처지라 변변한 찬거리가 있을 턱이 없다. 시장이 반찬이라 다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뚝딱 밥을 먹어 치운다.


밥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오후를 어떻게 보낼까 하고 연신 눈알을 굴린다. 집 밖 공터로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오후 반나절은 공터에서 공차기나 술래잡기로 시간을 보낸다. 걱정이나 근심이란 놈이 끼어들 틈이 없다. 꼬맹이들은 그런 여름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이때쯤이면 동네 어귀 수박밭이랑 참외밭에는 여름 향기가 익어간다. 아이들은 과일이 익어갈 때 입맛을 다시곤 했다. 한여름 밤 달이 뜰 때면 아이들은 그간의 은밀한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논두렁을 타고 살살 기어가 어른 머리통만 한 수박을 가슴에 가만히 안는다. 심장 소리가 원두막까지 들릴까 숨죽이며 엉금엉금 기어 개울가에 모여 앉아 입맛을 다신다. 그런 날 아이들은 오줌을 누느라 한밤중에 깨기 일쑤다.


이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아니 지금은 가게에 가면 얼마든지 수박을 맛볼 수 있다. 굳이 야밤에 그런 모험을 벌일 필요조차 없다.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깔린 지금을 궁핍하던 그 시절과 견주는 것조차 어리석다.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봤자 그저 눈만 껌벅인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이내 재미없다고 자리를 뜬다. 가끔 혼자 꺼내 보고는 추억 창고에 곱게 집어넣는다.


무더운 날이면 어릴 적 외가에서 보냈던 여름이 생각난다. 누구나 그런 아련한 어린 시절을 가슴에 품고 산다. 지금은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은 아득하고 추억만 남았다. 기억 중에서도 좋은 것만 추려 시간의 붓으로 멋있게 색칠한다. 옛이야기는 아득한 전설로 가슴에 남았다. 


행복의 뒤끝

옛날에는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있었다. 여자가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느냐, 아니면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면 그런 말을 감히 쓸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은 그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어머니의 삶은 애처롭고 짠하기 한량없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홀몸으로 자식을 건사하기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외가 생활을 끝내고 본가로 왔다. 이때는 어머니가 이미 대도시로 돈을 벌러 떠나고 안 계셨다. 연로하신 할아버지, 삼촌 내외 그리고 사촌들과 함께 생활했다. 궁핍한 살림에 딸린 식구를 거둘 만한 형편이 되는 집이 그리 흔치 않았다. 누굴 탓하고 원망할 수 없을 만큼 모두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1년에 한 번 집에 오시는 어머니의 곤궁한 처지가 어린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모성과 이른 결별이 주는 아픔이 분리 불안과 내면 아이(inner child)의 상심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꽤 오랜 시간 어머니와 정서적 유대가 그리 살갑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많이 노력했고 끝내 그걸 극복했다.  


신기하게도 더 어린 시절 외가에서 보낸 추억은 고스란히 남았는데 이 시절 본가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아 머릿속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절의 기억이 나의 뇌 신경회로를 연약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기댈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늘 힘들게 만들었다. 내면 아이를 다독이고, 뇌 신경회로를 재배치하는 데 공을 들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도시로 이사하면서 내 기쁨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단칸방 하나만 장만하면 나와 여동생을 부를 것이라는 어머니의 약속을 지키셨다. 산골 마을의 살림은 너나없이 궁핍해 탓하고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도시의 화려한 불빛은 산골 마을의 촉수 낮은 전등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온통 몸과 마음을 짓눌렀다.      


아픔은 기억으로 남는다. 빨리 잊히길 바라며 꺼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문뜩 떠오르면 얼른 기억 저장소에 넣어 단단히 봉한다. 흙을 켜켜이 쌓아 올려 봉분을 다지듯 기억의 저장소 위로 시간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이미 나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지금은 담담히 마주 보고 그때 왜 그랬는지 안다고 나를 다독인다.     


산골의 추억이 다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다. 아랫실못의 멱감기는 중이염을 불러왔다. 신기하게도 물에만 들어가면 귓병을 앓았다. 귀 안쪽 깊숙이 물이 고여 중이염을 달고 살았다. 병원이나 약방이 있을 턱이 없는 산골이라 갖은 민간요법을 사용했다. 그 바람에 오히려 청신경에 손상을 가져왔다. 청력이 나빠져 듣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로 생각한 귓병이 그리 오래갈 줄 몰랐다. 

   

시골 생활이 도시 생활보다 좋은 점도 많다. 병원 문제는 해결하기 힘든 숙제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도 급성 복막염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큰 도시에나 가야 수술할 수 있었다. 차편도 없는 야심한 밤이라 하루를 채 넘기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삶의 신산함을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대도시로 이사 나왔을 때는 중이염을 앓은 지 5년도 더 됐다. 당시만 해도 의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아 병원 치료를 받아도 잘 낫지 않았다. 치료받으면 잠시 나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재발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보니 고름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중이염이 천형처럼 그리 오랫동안 괴롭힐 줄 상상조차 못 했다. 게다가 전학 수속이 잘 못 되는 바람에 몇 달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어린 나로서는 어찌할 방법을 몰랐다. 이래저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도시 생활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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