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깨달음을 위해
마흔의 나이면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다고 했다. 내 불혹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 성운으로 갔을까. 늘 미혹하고 나만 안다. 공자는 쉰 살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했다. 지천명(知天命)은커녕 가까운 사람의 뜻도 헤아리지 못해 늘 말썽이다. 예순 살이면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어도 곧 이해가 된다고 했다. 귀가 부드러워지는 이순(耳順)이다. 여전히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헛발질하기 일쑤다.
깨달음을 위해 공부한다고 생색은 냈지만 이룩한 게 없다. 여전히 내 문제에만 골몰하고 다른 사람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는 방법조차 모른다. 참 딱한 노릇이다. 나도 답답한데 지켜보는 사람이야 얼마나 속에 천불이 날까. 말로만 깨치고 입으로 하는 공부가 뭔 소용이 있을까. 참회록이라고도 할 수 없고, 그저 반성문이라 불러야 마땅할 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른으로 살자 했는데 여전히 철없이 산다.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경제적으로 독립을 얻고 정신적으로도 성숙하게 살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둘 중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경제적 문제야 정신이 윤택하면 참을 만하다. 영혼이 아직 어리다는 점이 부끄럽고 황망하다.
어른이 되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환경 탓만 할 수도 없다. 힘든 형편에서 자랐지만, 어떤 사람은 보란 듯 떵떵거리며 산다. 또 어떤 사람은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즐기며 산다. 다 제 잘난 탓이고 제 능력이 출중해 잘 산다. 제대로 갈무리하지 않는 것은 오롯이 내 탓이다.
하고 싶은 건 많아 여기저기 손댔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그렇다고 뭐 딱히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되는 일은 없고 진도는 나아가지 않는다. ‘석탄 백탄 탈 때는 연기나 나지만, 이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안 난다’는 옛 노래가 생각난다. 속은 시커멓게 타고 하는 일은 늘 그 자리서 맴돈다. 하릴없이 세월만 가고 어느새 나이가 들었다. 그래도 깨달음을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나마 글쓰기가 낫긴 하지만
글쓰기나 그림 그리는 일은 되고 말고 할 일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 내가 만족하면 그만이다. 제대로 된 성과를 보이지 못했을 뿐이다. 심금을 울리는 글재주도 아니고, 감동을 주는 그림 솜씨도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재주에 불과하다. 평범함이 주는 아픔이다. 대가의 솜씨야 어찌 바랄 수 있을까. 속 시원하게 생각하는 대로 뽑아내는 일이 그리 힘들다.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소묘와 색감이 좋아야 한다. 노력해도 그게 잘 안 된다. 재주 있는 사람은 한 번에 스케치해도 입체감이 살아난다. 나는 몇 번이나 지우고, 또 그리고 했다. 나온 스케치가 실물과 동떨어졌다. 사람 얼굴을 그릴 때 더 그렇다. 번번이 좌절하니까 연필과 붓 잡기가 두렵고, 마음이 편치 않다. 몇 년을 그려도 늘 실력이 제자리인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나마 글쓰기가 조금 낫다. 글 쓰는 솜씨가 좋다는 뜻이 아니다. 그림보다는 큰 어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타이핑을 친다. 글감이 무엇이든 어쨌든 쓰긴 쓴다. 사람 마음을 울리는 기가 막힌 문장은 애당초 기대하기 힘들다. 남이 읽어 말뜻을 알아먹는다면 그것도 다행한 일이다. 여기저기 끄적거려 놓은 것들이 제법 된다. 그것들을 끄집어내 주제를 정하고 써본다.
내가 글을 쓴 동기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글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쓴 글을 찬찬히 읽었다 내 글을 읽을 때는 대견하다는 마음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생경한 느낌이 든다. 뭔가 양에 덜 차고 어색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보기 좋게 포장하는 데 급급해 절박한 진심을 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까. 그 경계가 없다.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는 것이 진실한 글일까. 헛갈린다. 개인의 삶은 단순히 그 개인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다. 이래저래 얽힌 삶이라 그걸 모두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솔직한 글이 감동을 준다는 말이 있다. 그 솔직함이 어디까지인지 알기 힘들다는 게 문제다.
우울한 청색 시절과 밝은 오렌지색 시절
내 글은 자전적 에세이에 가깝다. 살면서 느낀 점을 적은 글이다. 차마 말하기 싫은 개인사도 담겼다. 어디까지 공개해야 할까 망설였다. 진실만큼 강한 것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거짓을 말하거나 분칠한 것은 아니다. 다만, 공개하기 꺼려지는 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브런치에 들쑥날쑥 올린 글과 공개하지 않은 글 중에서 30개를 뽑아 두 개의 챕터로 정리한다. 주제의 일관성을 기준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 챕터의 글은 통시적이라고 할까? 시간과 주제의 연결성을 갖고 쓴 글이다. 두 번째 챕터의 글은 독립적으로, 각각의 주제에 따른 느낌을 적은 글이다. 이렇게 글쓰기의 매듭을 한 번 짓고, 다음 매듭으로 넘어간다.
첫 번째 챕터의 글은 10대와 20대의 방황과 그 원인을 찾는 글이다. 제목을 ‘청색 시절의 이야기’라고 붙였다. 그때의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도움받은 이론을 적었다. 이 글들을 공개하는 것이 여전히 쑥스럽고 민망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내 이야기를 할 때 빠지기 쉬운 과잉 감정을 무척 경계하며 글을 썼다.
청색(靑色)은 파랑(blue) 혹은 파란색으로 불린다. 청색은 450~475nm가량의 파장을 갖는 색이다. 중세 중반까지 유럽 사람들은 파란색을 우울한 색이라 여기며 멀리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가 입은 파란색 연미복이 우울과 고독의 상징처럼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든 시기를 색깔로 표현할 때 청색 시절이라 말하기도 한다.
10대와 20대에 지독한 아픔을 겪었다. 끝내 견디고 밝은 시간을 찾았다. 그때의 경험이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면 좋겠다. 혼자 깨치는 일이 참 어려우니까.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여전히 내 문제에만 골몰하는 버릇을 고치지는 못했다.
두 번째 챕터의 글은 30대 이후의 글이다. 청색 시절에서 얻은 경험과 생각을 다듬고 벼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깨달음을 통해 지혜를 얻고자 공부한다. 혼자 힘으로 어찌 그걸 이룰 수 있겠는다. 그래서 현자의 말씀을 듣고 책을 읽는다. 내게는 책과 현자의 말씀이 깨달음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판이다.
흔히 오렌지색으로도 불리는 오렌지는 노랑과 빨강의 사이에 있는 색이다. 오렌지색은 사회적인 색으로 불리는데 발랄함과 명예를 상징한다. 오렌지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에너지가 넘치고, 사교성이 좋아 사람들과 금방 친해진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이해심이 빠르다. 오렌지색은 기분을 들뜨게 하고 식욕을 돋워 음식을 많이 먹게 하는 효과가 있다.
오렌지색 시절의 글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의 글들이다. 이 글들은 개개의 독립된 주제로 이루어졌다. 어쩌면 타이핑을 멈추는 순간까지 깨달음은 미완으로 남을 것이다. 읽고 쓰는 일은 내게 주어진 과제다. 그 작업을 수행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