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벌써? 9억 4천만 킬로미터의 긴 여행을 마쳤다고? 며칠 후 오늘 밤 자정, 지구는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지구는 시간당 약 107,000km의 속도로 이동했고, 낮과 밤이 365번 바뀌었다. 처음 태양을 향해 길 떠날 때는 언제 한 바퀴 돌까 궁금했는데,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났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도 이맘때면, 사람들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냐는 생각에 흠칫 놀란다.
그렇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흐른다. 그런데 가만 따지고 보면, 시간은 실체가 있거나 물리적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간이 흐르고, 또 어떻게 빠르다고 말할까? 실제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계의 침들이 바삐 움직이지 않느냐고? 그건 우리가 그렇게 만든 기계 장치일 뿐이다. 단지, 지구가 태양을 향해 한 바퀴 도는 동안 일어나는 변화를 시간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동안 우리는 참 많이 변한다. 태어나서 자라고 성인이 될 때쯤이면 지구는 태양 주위를 스무 바퀴 돌았다는 뜻이 된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청춘이 아름다운 20대가 된 것이다. 그때는 시간이 무한할 줄 알았다. 아니 유한한 줄 알았지만, 지구가 태양 주위를 저 혼자 무심히 도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불혹의 나이를 말하자면, 지구가 태양을 40번 도는 동안에 가족을 이룬 어른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모두 결혼한 건 아니니까, 어쨌든 나이 40의 어른이 된 셈이다. 그 사이에 직장에서는 중견 간부가 되고, 날렵한 허리에 제법 보기 좋은 나잇살이 붙었을 것이다. 자기를 돌 볼 시간도 없이 아이들을 키우거나 살림살이를 불리기 위해 정신이 없다.
시간이란 개념이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의 외모만 보고 태어난 지 얼마나 되었나를 가늠해야 한다. 배가 얼마나 나왔는지, 얼굴에 주름이 많은지,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등을 따져가며 그 사람의 태어난 해를 맞춰볼 것이다. 그러다 보면, 태어난 시간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실수를 범하기 다반사다. 나이를 기준으로 생물학적 수명과 일할 연수를 정하는 사회에서 시간이 없다면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중세 수도원은 시간을 개념화하고, 시계를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수도사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일하고, 식사하는 등 일상적인 활동을 규칙적으로 수행해야 했다. 수도원의 엄격한 일정은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도구의 필요성을 낳았다. 영국 솔즈베리 대성당(Salisbury Cathedral)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4세기에 만들어진 기계식 시계가 남아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횟수는 고작 70~80번이다. 장수하는 사람은 100번, 혹은 그보다 몇 바퀴 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걸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하찮은 숫자일까. 지금까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 횟수는 무려 46억 번이다. 겨우 100번도 회전하지 않고 끝나는 사람의 일생이 참 짧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각자의 삶 속에서 또 한 번 지구의 시간 여행이 끝나간다. 올해도 다들 열심히 살았다. 너무 정신없이 일에 파묻혀 살다 보니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하고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저만치 앞서간다. 우리는 허겁지겁 시간의 그림자를 밟으며 나이를 먹는다.
사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봄날과 여름, 그리고 가을 끝자락까지 정신없이 달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마다 이맘때면 문득 세월이 주는 쓸쓸함과 고독에 묻힌다. 그게 삶이고 인생이다. 올해가 지나면 그대의 삶에서 지구는 태양 주위를 몇 번이나 더 회전할까? 많다고 해도 겨우 몇십 번 안쪽이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낌이 온다면, 사랑하기에도 짧은 찰나의 순간임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