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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Oct 24. 2022

하늘의 시간에는 매듭이 없다. 늦게 피는 꽃도 아름답다

여름과 가을의 마지막 전투

여름이 떠날 채비 하느라 분주하다. 펄펄 끓던 여름 왕국도 서서히 힘을 잃어간다. 남은 힘을 짜내 겨우 한낮의 시간을 지킨다. 가을의 척후병은 오래전에 침투했다. 이들도 한낮에는 힘에 부치는지 몸을 숨긴다. 아침과 밤은 이미 찬 바람의 차지다. 퇴각 명령을 받은 여름은 떠나기 싫어 뭉그적거린다.


가을이 들어서는 입추(立秋)가 지난 지는 꽤 됐다.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온다는 처서(處暑)도 지났다. 밤에는 모기 입이 삐뚤어질 만큼 날이 차다. 이른 아침 풀잎에 하얀 이슬 맺히는 백로(白露)가 눈앞이다. 서늘한 가을 기온이 산사와 도시의 구석구석을 점령할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여름과 가을의 마지막 전투가 끝나면 그예 세상은 온통 가을이다.


하늘과 자연의 시간에는 매듭이 없다. 몇 날 몇 시부터 여름이 시작되고, 몇 날 몇 시에 여름이 끝난다는 경계가 없다. 계절은 한날한시에 임무를 교대하지 않는다. 자연의 업무 일지에는 그 날짜가 따로 정해진 게 아니다. 낮과 밤을 나눠 갖다가 원래 주인이 힘을 잃으면 새 주인이 온전히 그 자리를 차지한다.

 

오는 계절과 떠나는 계절은 일정 기간을 함께한다. 야박하게 무 자르듯 내쫓지 않고 마지막 전투 때까지 기다려준다. 이 사이에 꽃은 피고, 열매는 맺고, 낙엽은 진다. 일찍 피는 꽃은 화려하고, 늦게 피는 꽃도 아름답다. 조숙한 과일이 이른 향기 날릴 때, 여물지 못한 열매는 속을 채우느라 바쁘다. 성급한 낙엽은 땅으로 떨어지고, 더딘 낙엽은 마지막까지 온 산을 물들인다.

    

하늘의 시간과 하늘의 그물에는 매듭이 없다. 엉성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 보이나 새는 법이 없다'라고 했다. 하늘의 품은 넉넉하면서도 촘촘하다. 성긴 하늘은 늦게 피는 꽃을 챙기고, 늦은 과일도 외면하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잎새를 품어주고, 철 잃은 새 한 마리까지 따뜻하게 안아준다.


사람의 시간에는 매듭이 있어 늦게 피는 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람의 시간에는 매듭이 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어기면 기다려주지 않는다. 수학능력시험, 입사 시험, 각종 자격 시험은 정해진 날짜를 변경할 수도 없다. 그 시간을 놓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연령 제한이라도 있으면 영영 응시 기회조차 사라진다.


특히 수학능력시험은 아이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중요한 시험이다. 어떤 아이는 일찍 머리가 터져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에 간다. 머리가 늦게 터지는 아이로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어느 대학을 나오느냐가 남은 수십 년의 생을 좌우한다. 이런 냉혹한 현실에서 이른 나이에 치른 시험으로 아이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아이마다 두뇌의 발달 속도가 다르다. 어떤 아이는 일찍 머리가 트이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머리가 늦게 트인다. 아이의 장래를 결정하는 시험 시기와 두뇌 발달 속도가 일치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두뇌가 늦게 발달하는 아이에게 이른 시험은 성장의 가능성을 막는다. 더구나 한 아이의 두뇌 속에서도 영역에 따라 발달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기다림은 중요하다.


어떤 아직 아이의 머리는 발달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기다려주지 않고 자꾸 다그치기만 하면 아이는 주눅 든다. 아이는 머리가 나쁘다고 스스로 단죄한다. 늦게 꽃 피울 아이는 경쟁을 포기하고 끝내 탈락한다. 시간의 매듭이 아이를 기다려주지 않은 탓이다.


늦게 아름다운 꽃을 피운 사람들

벤 카슨 박사


미국 디트로이트 흑인 빈민가 출신으로 5학년 때까지 전교 꼴찌를 도맡은 흑인 소년이 있다. 소년은 시험을 칠 때마다 수학 점수가 빵점이라 전교생의 놀림감이었다. 아이는 용기를 잃었고 자포자기했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안 돼요.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아요. 나는 바보인가 봐요!!" 하며 소년이 울먹였다.


소년을 유일하게 믿어준 어머니의 무한한 격려와 그녀의 독서 지도를 통해 아이는 눈부시게 성장한다. 놀라운 사실은 아이의 어머니는 가난한 고아 출신이라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어 알파벳조차 몰랐다. 그녀는 파출부와 허드렛일을 하며 홀로 아이 둘을 키웠다.


독서에 몰입한 아이는 고등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받고 예일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미시간대 의과대학원을 마쳤다. 26세에 세계 최고의 존스 홉킨스 병원 신경외과 의사가 되고, 33세에 신경외과 과장이 되었다. 1987년 머리가 붙어 태어난 샴쌍둥이의 두개골을 세계 최초로 성공적으로 분리했다. 그날 이후로 ‘신의 손’이라는 칭송을 얻은 흑인 의사 벤 카슨(Ben Carson)의 이야기다.      


스콧 배리 카우프만은 어린 시절, 중이염을 심하게 앓아 중추청각처리장애를 가졌다. 귀의 청각 신경에 생겨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언어 표현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학습 정보를 제대로 전달받을 수 없는 그는 지능 평가나 학업 성적 평가에서 매우 낮은 점수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을 두 번이나 유급하고 학습장애아 판정을 받았다. 9학년(우리나라의 중학교 3학년) 때인 1995년 만난 새로운 담임선생님 덕분에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다.      


장애아 반에 있지 말고 새로운 도전을 해 보라는 선생님의 격려에 카우프만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정상아 반에 옮기고 따라 첼로를 배웠다. 첼로 연주에 열중하면서 그의 인지능력도 향상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지과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세계 최고의 대학인 예일대학교 심리학과를 지원하려 했다. 여전히 낮은 학습 능력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스스로 백번 양보해 카네기 멜런 대학의 심리학과에 원서를 냈지만 떨어졌다.      


보통 사람이면 이 정도에서 좌절하고 포기한다. 카우프만은 카네기 멜런 대학의 성악과에 입학한 후 심리학과로 전과해서 인지심리학 공부를 계속했다. 심리학과로 전과한 카우프만은 열심히 공부해 카네기멜론 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2005년 게이츠 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2009년 그가 꿈에 그리던 예일 대학교에서 인지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이자 인간잠재력 과학 센터 소장으로 근무하는 세계적인 인지과학자로 꽃을 피웠다.      


이들이 늦게 꽃 피울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들에게는 끝까지 믿고 지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벤 카슨의 어머니가 그랬고, 쇼클리의 어머니가 그랬고, 카우프만의 담임선생님과 어머니가 그랬다. 어머니들의 독서 지도와 격려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했다. 어머니들은 시간의 매듭을 풀고 기다려주었다.


하늘의 넉넉함에 미치지 못해도 사람에게는 책이 있다. 책은 훌륭한 스승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네 마음을 이해한다. 나는 네 편이다'라고 말하며 지친 어깨를 다독인다. 아이들에 대한 기대를 잘게 쪼개 부담을 줄여주자. 책 속의 길과 시간에도 매듭이 없다. 나처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넉넉한 품을 빌려준다. 책은 오랫동안 변치 않고 기다려주는 삶의 길라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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