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에 젖은 나비바늘꽃

by Henry
나비바늘꽃.jpg 비에 젖은 나비바늘꽃


비의 랩소디

가을비는 여름비와는 선율이 다르다. 여름비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굵고 웅장한 교향악이라면, 가을비는 고요하고 우아한 실내악이다. 현악 사중주처럼 절제되고 우아한 가을비의 선율이 공기 중을 부유한다. 가늘고 촘촘한 은실처럼 가을비가 내린다. 가을비는 대지 위에 섬세한 물의 자수를 놓는다. 물방울의 바느질은 세상에 물기 젖은 가을을 새겨 넣는다.


맑고 투명한 물방울은 작은 수정이다. 투명한 보석들은 대지의 중력에 이끌려 천천히, 마치 우아한 발레리나의 동작으로 땅에 내려온다. 하늘에서 땅까지 이어지는 무수한 은빛 실이 공중에서 흩날리며 춤을 춘다. 빛줄기는 가을의 시간과 공간을 잿빛으로 엮어낸다.


창밖으로 스치는 빗방울들은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서둘러 내려와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 망설이듯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와 또르르 구르는 소리, 속삭이듯 창을 적시는 수줍은 속삭임. 소리는 유리 표면에 미끄러지면서 작은 강을 만든다. 비에 젖은 창은 세상을 부드럽게 일그러뜨려 추상화의 풍경을 그린다. 직선은 곡선이 되고, 선명함은 몽환으로 변한다.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공기는 시간을 느리게 한다. 습한 공기는 우울을 품는다. 슬픔이 아니라 깊은 사색을 부르는 침묵의 우울이다. 덕분에 세상은 잠시 숨을 멈추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본다. 고요한 우수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무거워진 나뭇잎은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세상은 조용히 명상에 잠긴다.


인천 영종도 네스트 호텔

행사가 있어 영종도를 찾았다. 가을비 속의 영종도 네스트 호텔은 세련된 모습을 드러낸다. 현대적인 고층 건물은 직선적이고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회색과 검은색이 조화롭게 배치된 외벽은 거대한 조각품처럼 서 있다. 층마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객실 창문들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건물 전체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호텔 하단부의 전면을 덮고 있는 거대한 통유리가 눈에 띈다. 투명한 유리 벽면은 하늘의 구름과 주변 풍경을 그대로 반사한다. 덕분에 건물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 유리에 맺힌 빗방울이 건물을 더욱 생동감 있게 한다.


호텔 주변으로는 잘 정돈된 조경이 펼쳐진다. 보도블록으로 깔끔하게 포장된 산책로와 군데군데 심어진 나무들. 도시적 세련미와 자연의 편안함을 준다. 호텔 뒤쪽으로는 넓고 잔잔한 호수가 펼쳐져 있다. 가을비를 맞은 호수 표면은 무수히 많은 빗방울이 동심원의 파문을 일으킨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수면에 닿을 때마다 생겨나는 작은 파문들이 서로 만나고 겹친다. 이내 흩어지는 빗방울은 호수를 살아 숨 쉬게 한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짙푸른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사계절 내내 변하지 않는 소나무는 상록의 자태를 뽐낸다. 덕분에 가을의 쓸쓸함을 달래주는 든든한 배경이 된다. 비에 젖은 소나무 가지들은 더욱 짙은 녹색이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가을 안개가 신비롭게 숲을 감싼다.


회색빛 하늘이 호수에 비친다. 흐린 날씨는 하늘과 물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비 내리는 날의 호수는 맑고 투명한 모습 대신, 깊고 신비로운 회색빛을 띤다. 물안개는 호수와 소나무 숲 사이의 경계선을 부드럽게 흐려놓는다. 비가 그린 한 폭의 수채화다.


호수 가장자리에는 돌로 쌓아 올린 제방이 있다. 그 위로 잘 정돈된 산책로가 이어진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호수의 서로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을철 호수와 숲이 만들어내는 그림 같은 풍경이 압권이다. 더구나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더할 나위 없는 풍경이다.


수줍은 소녀를 닮은 나비바늘꽃

호숫가 방죽을 따라 가을 야생화들도 비에 젖는다. 나비바늘꽃의 작고 섬세한 분홍과 흰 꽃잎은 빗방울을 머금어 더욱 선명하다. 가느다란 줄기 위에서 살포시 고개를 숙인 채,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비를 맞고 서있다. ‘섹시한 여인’, 혹은 ‘떠나간 이를 그리워함’이라는 꽃말. 그 뜻처럼 나비바늘꽃은 보는 이의 마음을 잔잔히 흔든다.


억새는 언제나 가을 풍경의 백미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는 은빛 물결로 일렁인다. 비 내리는 흐린 날씨 속에서 회색빛이 더 곱다. 작은 물방울 진주를 매단 억새는 바람에 고개를 흔들며 물방울을 털어낸다. 억새 사이를 파고드는 빗방울 소리는 가을의 노래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하늘을 뒤덮은 먹장구름은 흐린 가을 하늘을 완성한다. 짙은 회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구름은 층층이 쌓인다. 거대한 회색 구름 천막은 세상을 덮는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이륙한 거대한 여객기가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구름 짙게 덮인 하늘 속에서 비행기는 또렷하게 보이다가 점점 흐릿해진다.


비행기의 은색 동체가 구름에 가려지면서 마치 유령선처럼 희미하다. 구름의 밀도가 다른 부분을 지날 때 비행기는 선명해지다가 다시 희미해지기를 반복한다. 날개 끝에서 나오는 하얀 비행운만이 구름 속에서 더욱 흐릿하다.


설렘으로 떠났다 아쉬움으로 끝나는 여행

가을비 내리는 영종도의 오후는 자연과 인간의 문명이 어우러진 한 편의 서정시 같다. 호수와 들꽃, 억새와 먹장구름, 그리고 구름 사이를 뚫고 지나는 비행기까지... 이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가을비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에서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다.


이 순간이 바로 여행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새로운 장소에서 만나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느끼는 마음의 여유. 네스트 호텔에서 바라본 비에 젖은 가을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간 후에도 마음 한편에서 잔잔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설렘으로 떠난 여행은 아쉬움으로 끝나지만, 그 아쉬움 덕분에 다시 떠날 날을 꿈꾼다.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돌아오는 길, 철 지난 을왕리 바닷가에 섰다. 비 내리는 바다와 하늘 사이에 선 나는, 또다시 떠날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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