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끝내 ‘안녕’이라 말하지 못하고..

by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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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작별 앞에서

나뭇잎 앞에 두고 바람은 한참을 망설인다. 그러다가 제 설움에 겨워 끝내 마지막 잎새를 떨군다. 꽃잎이 땅에 내려앉기 전, 꽃은 남은 힘을 쥐어짜 향기를 세상에 흩뿌린다. 강물이 먼 길 흘러와 바다와 만날 때, 아쉬움에 긴 소용돌이를 만들어 머뭇거린다. 강물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떠남이 두려워 경계선을 맴돈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결별의 아픔에 붉디붉은 울음으로 서쪽 하늘을 적신다. 새벽달이 자리를 비우고 떠날 때 이내 달그림자는 사라지고 밤별만 또렷하게 빛난다.


이별은 언제나 그렇게 찾아온다. 말없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강물이 바다에 닿는 순간 이름을 버리듯, 계절도 자신을 놓아야 다음 장을 넘길 수 있다. 모든 만남 속에는 이미 작별이 숨어 있고, 모든 시작에는 끝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자연은 그것을 알고 조용히 받아들인다. 나뭇잎을 떨구는 바람도, 꽃잎 내려놓는 꽃도, 바다로 스며드는 강물도, 해와 달도 끝내 '안녕'이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만나고, 사랑하고, 떠나보낸다. 눈물과 미소를 동시에 머금은 채로. 결별이 아픈 이유는 다시 볼 수 없는 슬픔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결별은 끝내 '안녕'이라는 한마디 말을 아끼는 것일지 모른다. 바람도, 꽃도, 강물도, 지평선 너머로 지는 저녁해도, 홀연히 사라진 저녁달도 끝내 그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름은 다르다. 가야 할 때를 알고 조용히 떠나는 이의 아름다움을 여름은 모른다. 그렇게 등등하던 기세를 내팽개치고 몇 날을 두고 비를 뿌린다. 푸른 잎사귀들이 햇살에 반짝이던 황금의 시절을, 매미들이 온 힘을 다해 울어대던 뜨거운 오후를 여름은 잊지 못한다. 바다가 가장 푸르고 하늘이 타오르던 그 계절을 세월 속으로 흘려보내기가 너무 서럽다.


작별이 서러운 여름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시간의 강물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간다. 여름의 맹렬한 거부도 차츰 약해지고, 설금설금 뒤로 물러선다.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하루가 다르게 잦아든다. 한때 온 세상을 뒤덮었던 그 뜨거운 합창이 이제는 듬성듬성 몇 마리의 외로운 목소리로 줄어들었다. 나무 그늘에서 땀방울을 식히던 사람들은 어느새 긴소매를 찾고, 해변을 수놓던 파라솔들은 하나둘 사라진다.


아침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 창문을 여니 예상치 못한 서늘함이 볼에 들이쳤다. 여름 내내 뜨거웠던 창밖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밤새 이불을 걷어차고 잠들었는데, 새벽녘엔 이불을 단단히 싸매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끈적했던 여름 공기는 사라지고, 투명하고 시원한 공기가 가득하다. 소리 없이 스며드는 이 서늘함은 여름의 끝을 알리는 전령이다.


그런 사정을 외면한 채, 여름은 끝내 결별을 거부하고 자기 연민에 몸부림친다. 조용히 내미는 가을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며 뒤로 물러선다. 그러고는 먹구름을 잔뜩 몰고 와 한바탕 심술궂은 비를 쏟아붓는다. 마치 헤어지자는 연인에게 화가 난 사람처럼,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흐렸다 개었다 하는 여름의 변덕에 사람들은 눈치를 본다. 아침에 우산을 챙겨 나갔다가 뜨거운 햇살에 얼굴을 그을린다. 얇은 옷을 입었다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흠뻑 젖기도 한다. 변덕스러운 늦여름 날씨를 따라 마음도 들뜨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여름의 마지막 감정에 휘둘리며 우리도 모르게 그 이별의 아픔에 젖는다.


다시 올 여름을 위해

우리도 계절을 살아간다. 청춘이라는 여름이 저물 때면 그 찬란함에 매달려 발버둥 친다. 첫사랑의 꽃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우리는 나무를 붙들고 꽃잎 지지 않으려 한다. 시간은 강물처럼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아이의 웃음소리 위에도, 할머니의 기침 소리 위에도 똑같은 물결이 지나간다.


자연은 누굴 원망하지 않는다. 떨어지는 낙엽은 가지를 원망하지 않고, 저녁에 지는 석양은 동쪽을 돌아보지 않는다. 겨울이 오면 꽃들은 고분고분 시들어가고, 나무들은 조용히 긴 겨울잠에 든다. 봄이 오기를 조르지도 않고, 여름을 부러워하지도 않으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온다. 누군가의 등이 멀어져 갈 때, 마지막 기차가 떠날 때, 빈 의자 앞에 설 때. 그때 우리는 자연처럼 조용히 손을 흔들고, 웃으며 배웅하고, 그 빈자리에 감사한다.


여름도 이제 가을을 위해 시간을 놓아주어야 한다. 어쩌면 내리는 비는 여름의 마지막 작별 인사일 것이다. 이 비가 그치면 성큼 가을이 와 있을 것이다. 여름이 울면서 떠나가는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가을이 설렘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내년에 다시 올 여름을 위해 우리는 오늘의 이별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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