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추(夏秋)의 전투, 계절이 남긴 삶의 노래

by Henry


가을의 첫 승전보

밤낮으로 여름과 가을이 대지를 두고 팽팽한 싸움을 벌인다. 호시탐탐 진지를 노리는 가을 침략군의 눈길이 매섭다. 새벽 야음을 틈타 서늘한 창으로 여름의 방어선을 뚫는다. 가을의 병사들은 차가운 바람을 몰아치면서 진지 깊숙이 침범한다. 깊은 잠에 빠진 여름 병사들은 가을의 급습에 화들짝 놀란다. 동이 트기 전이라 잠시 뒤로 물러난다. 가을이 승리한 것인가? 이렇게 하추의 전투가 싱겁게 끝날 일이 아니다.


새벽 4시, 가을의 선발대가 움직인다. 이슬을 무기 삼은 기습부대가 풀잎과 꽃잎 위에 차가운 물방울을 하나둘 떨어뜨린다. 서늘한 바람이 정찰병처럼 골목을 누비며 숨어 있는 더운 여름의 잔재들을 찾아낸다. 가을 선발대의 기습 공격에 시끄러운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그 자리에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의 조용한 연주가 들려온다. 이렇게 시작된 하추의 전투에서 가을이 첫 승전가를 울린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을 순순히 내줄 여름이 아니다. 오전 8시, 수평선 너머에서 태양이라는 절대 군주가 깨어난다. 여름 제국의 황제가 직접 전투에 나선 것이다. 지평선 위로 모습을 보인 첫 번째 햇살이 신호탄처럼 하늘을 가른다. "반격 개시!" 강렬한 햇살이 비 오듯 머리 위로 쏟아진다. 아뿔싸, 가을 척후병이 심어놓은 차가운 이슬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서늘했던 공기는 다시 뜨거워지고, 남은 여름의 열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지를 뒤덮는다.


오전 10시, 여름의 기세가 다시 살아난다. 태양은 중천을 향해 힘차게 솟구치고, 머리 위로 불덩이 같은 햇살을 쏟아낸다. 기온이 28도에서 29도를 훌쩍 넘어가자, 새벽녘에 잠시 스며들었던 서늘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람들은 긴 팔을 벗어던지고, 다시 선풍기와 에어컨을 찾는다. 고요하던 공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여름의 숨결이 골목마다 가득 차오른다.


태양의 반격

한낮은 다시 여름의 세상이다. 햇빛은 다시 대지를 달구고, 그늘마저 가쁜 숨을 내뱉는다. 가을의 전령인 새벽이슬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귀뚜라미의 노랫소리도 한낮의 바람에 진작에 흩어졌다. 새벽 조심스레 고개를 들던 나뭇잎과 꽃잎은 이글거리는 태양 앞에 다시 고개를 떨군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가을이 아니다. 전투는 점점 달아오른다. 오후 5시가 지나자, 가을이 조용히 여름을 둘러싼다. 서쪽 하늘부터 태양의 각도가 서서히 낮아지면서 태양의 열기도 차츰 약해진다. 나무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뜨거운 바람의 숨결도 한결 순하게 변한다. “바로 지금이다!!” 가을은 숨을 고르며 긴 그림자로 서서히 다가온다. 낮 동안 잠잠했던 하추(夏秋)의 긴장이 다시 살아난다.

밤은 가을의 제국

오후 7시 무렵,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며 태양이 천천히 자취를 감춘다. 공기는 점점 부드러워지고, 나무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진 땅의 주인이 바뀐다. 잠시 멎었던 귀뚜라미 울음이 다시 시작되고, 시원한 바람이 골목을 지나며 낮의 열기를 몰아낸다.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서,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저녁은 다시 가을의 품으로 돌아온다.


밤 10시가 되면 가을이 완전히 전장을 장악한다. 승리한 가을 진영의 깃발처럼 밤하늘에 별들이 펼쳐지고, 은빛 갑옷을 입은 달빛이 휘영청 떠오른다. 차가운 바람이 여름의 잔재를 말끔히 쓸어가고, 밤이슬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드디어 밤의 세상은 가을의 영토임을 선포한다. 귀뚜라미와 풀숲 벌레들의 합창이 밤공기를 가득 메우고, 고요한 가을밤이 제 모습을 찾는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뿐. 다음 날 새벽이 되면 가을은 또다시 방어선을 세워야 한다. 계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전세 역전이 일어나는 치열한 전장이다. 새벽에는 가을이, 한낮에는 여름이, 저녁에는 다시 가을이 번갈아 계절을 지배한다. 이렇게 밤이 되면 별빛이 하늘을 덮고, 계절의 전장은 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

환절기에는 날씨 변덕이 갈수록 심해진다. 두 계절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동안, 구름이 갑자기 몰려왔다가 금세 사라진다. 바람의 방향도 수시로 바뀐다. 여름옷을 모두 치우기엔 아직 이르고, 그렇다고 가을옷을 꺼내지 않으면 아침의 쌀쌀함에 몸을 떤다. 사람들은 가을이 완전히 승기를 잡기 전까지는 반 팔과 긴 팔, 얇은 카디건과 두꺼운 재킷으로 수시로 바꿔 입는다. 사람들은 여름과 가을의 줄다리기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으며 계절을 살핀다.


9월이면, 대세는 이미 가을 편이다. 아무리 태양이 고약해도 낮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밤은 길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을 점령지도 넓어진다. 여름 왕국의 마지노선이었던 섭씨 30도가 무너졌다. 이제는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여름이 게릴라전을 벌이는 형국이다.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속에서 사람들은 옷장 앞에서 망설이며 계절의 눈치를 본다


청춘의 시절을 그리워하듯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온몸으로 뜨거운 열기를 견딘 과일은 단맛을 더하고, 단풍은 더 고운 빛깔을 자랑할 것이다. 넘치도록 더운 역할을 수행한 여름 잔당을 물리치고 나면, 가을 햇살은 온 힘을 다해 풍요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과일은 탐스럽게 익어가고, 벼는 황금색 알곡을 채울 것이다. 이 풍요는 한여름의 불같은 열기와 가을의 다정한 햇살이 함께 빚어낸 선물이다.

지루한 전투는 결국 가을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징글징글한 여름이 간다면, 기꺼이 달려 나가 기다리던 가을을 맞을 것이다. 숨 막히는 무더위가 물러나고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 저녁이면 소소한 행복에 젖는다.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기쁨은 가을이 주는 큰 선물이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목 빼고 기다리던 가을이 드디어 우리 곁에 왔다.


그렇게 계절이 자리바꿈을 하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세월은 간다. 눈앞의 여름이 가는 걸 기뻐하는 사이에 나도 어느새 나이가 든다. 몇 번의 여름과 몇 번의 가을이 서로 자리바꿈을 하면 우리는 어디로 갈까? 그러니 가는 여름을 마냥 속 시원하다고 외면하기가 심란하다. 분명 지겨웠고 괴로웠던 그 뜨거운 날들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우리 삶의 일부였고, 되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다. 이 뜨거운 계절도 언젠가 추억 속에서 가장 빛나는 한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안다. 가을이 지나고 기온이 뚝 떨어지는 한겨울이 오면, 분명 뜨거운 태양이 그리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한겨울 몹시 추운 어느 날, 온몸을 휘감는 한기에 몸을 떨면 여름의 폭염을 그리워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아이러니다. 우리는 현재를 견디고 미래를 바라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 미래가 현재가 되면 또다시 과거를 그리워한다. 여름에는 가을을 기다리고, 가을 지나 겨울이면 여름을 그리워한다. 아프고 매운 청춘을 보내고 느긋한 중년이 되어도, 우리는 그 청춘을 그리워한다. 그렇게 계절도, 인생도 늘 돌아보고 또 기다리며 흐른다.


인생도 계절처럼 흐른다. 청춘은 여름처럼 뜨겁고, 중년은 가을처럼 차분하며, 노년은 겨울처럼 고요하다. 계절은 반복되지만, 한번 흘러간 인생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가는 여름이 늘 좋을 수 없고, 오는 가을이 항상 기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걸 막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는 세월을 원망하지 않고, 오는 가을을 기쁘게 맞이할 뿐이다. 그렇게 살아낸 계절들이 모여 결국 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나는 그 뜨겁고 서늘했던 이야기를 아련히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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