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끝자락, 바다의 여인

by Henry


숨 막히는 도시를 뒤로하고

8월의 끝자락, 도시는 연일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에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듯 달궈졌다. 건물마다 매달린 에어컨 실외기들은 거대한 용광로의 배기구처럼 뜨거운 바람을 토해냈다. 도시는 오븐 속처럼 달아올랐고, 가로수 잎은 햇살에 타들 듯 바스락거렸다. 강아지들은 혀를 축 늘어뜨린 채 그늘을 찾아 방황했고, 거리는 사우나처럼 뜨거운 증기로 가득했다. 화분의 꽃들은 아무리 물을 줘도 금세 고개를 떨군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열기로 태워버릴 듯한, 그런 여름이다.


지하철역 플랫폼은 더더욱 괴롭다. 사람들은 연신 부채질을 하지만, 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플랫폼의 에어컨은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뜨거운 바람에 밀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역사 통로의 공기는 후텁지근해, 마치 두꺼운 담요를 뒤집어쓴 듯 답답하다. 땀에 젖은 셔츠는 등에 들러붙고, 사람들의 얼굴은 열기로 벌겋게 달아오른다. 불쾌지수는 이미 하늘을 찌르고, 누군가 어깨만 스쳐도 금방이라도 화가 터질 것 같다.


이런 날, 나는 불현듯 기타를 차에 싣고 강원도 양양 현불사로 향했다. 숨 막히는 도시의 열기를 뒤로한 채 고속도로를 달린다. 차 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은 바깥의 뜨거운 열기를 차단한다. 한여름의 농익은 풍경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논둑의 벼 이삭은 고개를 숙이며 황금빛으로 물들 채비를 서두른다. 산비탈의 잡풀은 짙푸른 초록으로 무성해져 오솔길마저 삼켜버렸다. 간간이 보이는 농가 마당에는 빨간 고추가 널려 있고, 담장 곁의 해바라기는 목을 길게 빼고 연신 태양의 꽁무니를 쫓는다.


하늘에는 웅장한 적란운이 거대한 성곽처럼 치솟았다. 주변의 작은 적운들은 양떼처럼 흩어져 다니다가, 빨려들 듯 모여들며 서서히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구름 가장자리에는 찢어진 천 조각 같은 꼬리구름이 바람에 흩날리고, 하늘은 금세라도 한바탕 소나기를 퍼부을 듯 숨을 멈춘다.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물기를 머금은 구름도 두껍고 힘이 넘친다.


차가 강원도에 접어든 지 한참이 지났다. 평창 휴게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자동차는 다시 속도를 높여 고속도로를 달린다. 매끈하게 뻗은 동해고속도로 위로는 드문드문 차들이 오간다. 도로는 한적하고, 그 고요함이 질주 본능을 자극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차창 밖 산등성이들이 내 어깨와 나란해지고, 짙푸른 산들은 검은빛에 가까운 초록으로 이어져 거대한 능선을 그린다.


광진해변, 잊힌 여름

동해고속도로를 내려 양양 방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림 같은 강원도의 풍경 속으로 차가 빨려 들어간다. 서핑 천국으로 이름난 인구해변에 들어서자, 예전만큼의 열기는 아니지만 골목마다 서울 번호판을 단 차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햇볕에 그을린 젊은이들이 웃통을 벗은 채 서핑 보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간다. 나는 길가에서 주전부리와 과일을 사 차에 싣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청춘의 자유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인구해변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현불사로 가는 길이 나온다.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현불사를 만난다. 왼쪽으로는 광진해변이 넓은 품을 연다. 인구해변에 비하면 광진해변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서핑족들이 찾지 않는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하다. 한때 가족 단위 피서객들로 붐볐던 해수욕장은 이제 출입 금지 테이프가 나부끼며 쓸쓸히 폐쇄되어 있다. 바람이 제법 거세어서 모래알들이 발목을 스치고 지나가고, 파도 소리만 귓가에 맴돈다.


방파제 끝에는 앙증맞은 노란 등대가 외로이 서 있다. 등대는 마치 바다를 지키는 작은 파수꾼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철 지난 바닷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모래사장을 따라 조개껍데기를 줍는 아이들과 파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젊은 여인은 여름 끝자락에서 바다와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모래사장으로 발을 내딛자,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모래의 감촉이 부드럽다. 철 지난 바닷가에는 파도만 끊임없이, 그리고 조용히 밀려왔다가 간다. 수평선 저 멀리서 작은 물결이 거대한 물결로 해안가 모래밭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수백만 년을 한결같이 파도는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아득히 수평선을 바라보니 회색빛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했다. 어디서부터가 하늘이고 어디서부터가 바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둘은 하나의 거대한 회색 캔버스처럼 펼쳐져 있다. 구름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바다 표면에 은빛 비늘 같은 반짝임을 만들어낸다. 아득한 멀리 보이는 수평선은 마치 세상의 끝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바다의 여인

나는 모래 위에 악보 거치대를 세우고, 접이식 의자에 앉아 기타를 꺼냈다. 바닷바람이 기타 줄을 스치자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한동안 손끝으로 현을 튕기며 바닷바람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소금기 가득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면서, 도시의 먼지와 스트레스까지 함께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오래전에 불린 노래 <바다의 여인>의 첫 음을 튕기자, 파도가 이내 화답한다. Dm에서 Gm 코드를 옮기는 순간, 파도 소리가 잊지 않고 응답한다. 바닷바람에 가볍게 떨리는 기타 줄의 진동이 내 가슴 깊이 스며든다. 철 지난 해변의 고요와 파도의 리듬, 그리고 내 노래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이 순간,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타인의 시선도, 환호도, 비평도 없이 오직 파도와 바람만이 내 노래를 듣는다.


해가 서서히 기울자, 하늘빛도 변한다. 회색 구름 사이로 주황빛이 스며들더니, 이내 붉은빛이 점점 짙어진다. 수평선은 깊게 물들고, 잔잔한 물결마다 붉은 하늘을 반사한다. 기타 줄에도 노을이 내려앉고, 내 손끝에서 흘러나온 선율은 바다 저편, 노을 속으로 천천히 흩어진다.


노을 진 바다 위로 <바다의 여인>의 마지막 후렴이 퍼져 나간다. 어느새 나는 이미 노래 속의 주인공이 된다. 마지막 코드를 끝내자, 여운은 한참 동안 바다를 맴돈다. 관객은 없지만, 파도와 바람과 노을이 나를 위해 박수를 쳐 준다. 기타를 케이스에 넣고, 의자와 악보 거치대를 정리하며 바다를 바라봤다. 하늘은 짙은 자줏빛으로 물들고, 바다는 그 색을 받아 신비로운 보랏빛으로 번졌다. 저 멀리 첫 별이 떠오를 즈음, 나는 현불사로 가는 산길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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