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 다른 오솔길의 고독

by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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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 정겨운 오솔길

문을 열고 나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초록빛 숲의 향기다. 본관으로 향하는 오솔길은 내겐 무척이나 특별한 장소다. 아스팔트나 콘크리트가 아닌,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낡은 철도 침목들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깔려 있다. 무겁지 않은 발걸음마다 묵직한 울림을 전해준다. 침목이 깔린 오솔길은 넓지 않은 캠퍼스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공간으로 남아 있다.


침목은 제각각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것은 비바람에 씻겨 회색빛으로 바랜 채 나이테처럼 깊은 주름을 새겼다. 어떤 것은 아직도 짙은 갈색을 유지하며 침목 특유한 냄새를 은은하게 풍긴다. 어디서,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먼 옛날 기차를 실어 나르던 철길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했다. 수많은 기차와 사람들을 실어 나르다가, 이제 이곳에서 또 다른 발걸음을 조용히 받아주고 있다.


길 양편으로는 울창한 숲이 터널을 이룬다. 한여름이면 참나무가 하늘 높이 뻗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단풍나무와 느티나무가 갈색과 노란빛으로 숲을 물들인다. 봄의 연둣빛 새순, 여름의 짙은 초록, 가을의 붉고 노란 단풍, 앙상한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은 계절마다 이 길을 전혀 다른 풍경으로 바꿔놓는다.


나무 아래에는 관목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봄이면 철쭉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조팝나무는 하얀 눈꽃 같은 꽃송이로 길을 수놓는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회양목이 숲의 생명력을 지켜내며, 그 사이로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소담스레 고개를 내민다. 제비꽃은 하트 모양 잎 위로 보랏빛 꽃잎을 펼치고, 별꽃은 얇디얇은 흰 꽃잎이 별 모양으로 갈라져 햇살에 빛난다. 바람이 불면 개망초의 흰 꽃잎들이 일렁이고, 숲은 파도처럼 흔들린다.


계절이 물드는 고독

봄은 숲 가장자리에 심어진 노란 개나리에서 시작된다. 밝고 쾌활한 봄의 오솔길은 향긋한 고독으로 가득하다. 여름 숲은 사납게 내리쬐는 햇살로부터 아늑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그 길은 단단하면서도 열정적인 고독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갈색빛으로 물드는 가을 숲은 결실의 풍요를 잠시 스치듯 지나, 다가올 겨울을 예비하며 쓸쓸한 고독에 잠긴다. 이윽고 겨울이 오면 오솔길의 벤치에도, 침목 위에도, 나무 밑동에도 지천으로 떨어진 낙엽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는다. 시리고 차가운 하얀 고독이 겨우내 숲을 감싼다.


오솔길 그늘진 곳곳에는 낡은 나무 벤치가 놓여 있다. 등받이의 갈색 페인트는 세월에 바래 군데군데 벗겨졌지만, 그 흔적 덕분에 오히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 벤치에 앉으면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멀리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그럴 때면 나는 오래 묵혀둔 생각들을 하나씩 꺼내 본다.


가끔 생각이 막힐 때면 벤치에 앉아 한참을 머문다. 발밑의 침목을 바라보며 나무들이 지나온 긴 세월을 상상해 본다. 어디선가 자라난 나무가 베어져 침목이 되고, 수많은 기차와 사람들을 실어 나르다가, 이곳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을 조용히 받아주고 있다. 그 순환과 지속의 의미 속에서 나는 철마다 빛깔 다른 고독을 즐긴다.

숲은 계절마다, 날씨마다, 하루의 시간대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아침 이슬에 젖은 나뭇잎은 햇살에 반짝이며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저녁이면 붉은 노을빛이 숲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비 오는 날이면 빗방울이 잎사귀를 두드리며 작은 연주회를 열고, 바람이 거세게 불면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숲 전체를 울리는 교향곡이 된다.


문을 열면 곧 만나는 오솔길, 본관까지는 불과 몇 분 거리지만 이 길에서 얻는 것은 시간으로 셀 수 없다. 머리를 맑게 하는 공기,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숲의 소리, 그리고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고요한 사색의 시간. 계절마다 빛깔을 달리하는 이 길의 고독은 오늘도 나를 고요로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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