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nry Oct 24. 2022

적자생존이 아니라 협자생존이라면 살만 하지 않을까?

적자생존의 세상

인류는 장구한 시간을 거쳐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적자생존의 원리를 잘 따랐고, 자연선택을 통해 지구의 주인이 됐다. 우리는 원시 생명체가 인류가 되기까지의 긴 세월이 진화의 역사라 배웠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자연환경에 적응한 생명체는 진화를 거듭해서 살아남았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긴다.     


자본주의는 시장의 효율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운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자나 혹은 친구라도 도륙해야 한다. 사람 사이는 비정해졌고, 그만큼 사람들은 외롭고 고독해졌다. 경제를 파편화하고 개인을 고립시키는 적자생존의 원리는 인간성을 파괴한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뇌의 신경회로를 엉클어버린다. 극단적 경쟁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많은 정신적 문제를 야기한다.


자본주의는 늘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강요한다. 직장은 살벌한 전쟁터가 됐다. 올라갈 자리는 적고 사람은 많다. 회사 조직은 피라미드 구조다. 한정된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치열하다. 극도의 경쟁은 사람을 힘들게 하고. 정신적 피로를 몰고 온다. 사람들의 뇌 신경회로는 스트레스로 멍든다. 이것이 현대인이 마주한 적자생존의 살벌한 풍경이다.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이 중요한 진화의 동력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도 자연에 살벌한 경쟁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진화생물학자들은 경쟁보다 협력을 통해 자연의 선택을 받은 사례를 보여준다. 개체 간 상호작용과 협력을 통해 종의 다양성이 확보됐다. 그 결과 종과 종 사이에 서로 협력하는 건강한 생태계를 이뤘다. 적자생존을 통한 경쟁뿐만 아니라 상호협력도 진화의 중요한 동력이라는 주장이 부상했다.


협력생존도 중요하다.

해양생태학자 마크 버트니스의 『문명의 자연사』, 세계적인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의 『마이크로 코스모스』, 독일의 요아힘 바우어의 『협력하는 유전자』에서는 진화 과정에서 적자생존만이 유일한 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은 경쟁 못지않게 협력도 생명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적자생존보다 협력생존이 더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경쟁은 생명체의 진화를 결정하는 단 하나의 원리가 아니다. 자연에는 경쟁만 있는 것이 아니 협력도 있다. 적자생존 못지않게 협력생존한 사례도 많다. 생명체들은 서로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협력함으로써 증식하고 복잡해졌다. 또 인간은 서로 끝없이 경쟁을 벌이는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라, 현명하게 '협력하는 유전자' 덕분에 발전했다고 말한다.


법학자인 필립 E. 존슨은 『다윈의 심판대』에서 다윈의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은 논리적 모순과 비약투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다윈의 자연선택을 증명할 화석 증거나 분자적 증거가 아예 없거나 빈약하다고 말한다. 생명체의 진화과정을 연결하는 중간 고리의 화석과 어떤 분자적 유전자적 연결고리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브루스 립튼(Bruce Harold Lipton) ·스티브 베어맨(Steve Bhaerman)의 저서 『자발적 진화』에 따르면, 17세기 이전의 과학은 생명을 하나의 조화로운 협력의 과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윈을 전후로 자연이 '젖을 주는 어머니'로부터 '폭력이 난무하는 정글'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상호협력 활동을 통해 세포들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여 생명력을 향상하고 발전했다고 말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는 식량을 구하는 일이 생존을 위해 중요한 과제였다.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둘쭉날죽해 매번 식량을 구하는 보장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사냥에 성공할 때 또 다른 사람은 실패할 수 있다. 사냥에 성공한 사람은 다음에 자신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사냥감을 나눠준다. 이렇게 하면 두 사람이 이기적으로 고기를 독차지할 때보다 상호적 이타성을 통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거래를 통한 이득은 상호적 이타성의 진화를 위한 무대를 만들었다고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가『진화심리학』에서 말했다.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도 적자생존이 가능할까?

적자생존의 원리를 미래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강한 인공지능이 출현할 것으로 예견되는 미래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진화의 원리가 그때도 적용될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강한 인공지능과 1:1로 경쟁하면 인간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인간들끼리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해야 하지 않을까.


일부 미래학자들은 인공지능(AI)의 발전이 가속화되어 모든 인류의 지성을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난 초지능(Super Intelligence)이 조만간 출연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중 한 사람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자신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2040년쯤이면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나타날 것이고 말한다. 이때가 세상이 지금과 전혀 달라지는 지점인 특이점(Singularity)이다.


사진 출처 : https://brunch.co.kr/@shinabro/364


특이점은 기술 변화의 속도가 급속히 변함으로써 인간의 생활이 지금과 전혀 달라지는 시점을 말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무의미해지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을 통과하면 특이점이 시작한다. 물리학에서 블랙홀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경계선을 사건의 지평선이라 말한다. 블랙홀에 빨려들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다.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도 적자생존이 통할까? 모르긴 몰라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보다 더 똑똑한 인공 지능이 득시글거리는 판에 적자생존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초지능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은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얼 해야 하나? 초지능이 나타나지 않도록 빌어야 할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꿔야 한다고 본다.


협자생존(協者生存)이면 직장 다닐 맛이 난다.

이만하면 적자생존만큼이나 협력생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리에다 협력하는 자가 살아남는 협자생존(協者生存)의 원리를 덧붙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승자 독식의 근거가 되는 적자생존의 원리에다 협자생존의 원리를 우리의 가치관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 돕는 자가 생존하는협자생존(協者生存)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적자생존과 같이 활용하자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안전과 확실함에 대한 욕구와 추방·고립의 두려움은 에리히 프롬 등의 사회학자들이 잘 설명했다. 우리의 지위에 맞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 자유로운 사람이 될수록 사회로부터 떠났다는 불안감에 몸을 뜬다. 경제적·정서적 궁핍 속에서 혼자 버려진 두려움이 엄습한다. 자유를 포기하고 회사의 보호막 아래로 들어간다. 그것이 경쟁 사회의 약자가 살아가는 운명이다.   

  

적자생존만이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 협자생존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면 더불어 사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협력하고 도우면 더 나은 성과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생명체가 진화 과정에서 보였다. 지금까지 우리의 지식이 모자라 생명체의 협력 진화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인간이라고 그리 못할 이유가 없다. 경쟁과 협력의 조화로운 사회 시스템을 고민해야 할 때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직장에서도 지나친 경쟁을 자제하고, 상호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든다면 회사 다닐 맛이 날 것이다. 동료가 적대적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적 동지로 보이는 순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생긴다. 훈훈한 인간미가 넘치는 직장이라면 크게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다. 뇌의 신경회로는 건강하고 신경전달물질은 안전하게 시냅스의 강을 건넌다. 모두의 머리가 맑고 깔끔해진다. 개인의 힘으로 행복을 만들어가기 힘들다면 사회가 함께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직장인 후배를 위한 변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