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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Oct 24. 2022

상처 많은 강은 깊이 흐른다.

상처 많은 강의 깊이 흐른다.

저녁 노을 지는 강 - 수채화(2019)



강은 먼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제 속을 할퀴며 지났을까. 그 아픔으로 제 속을 후벼 파내 넓어지고 깊어졌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풍화와 침식을 견디고 끝내 강은 저리도 유장하게 흐른다. 제 속을 무던히도 생채기 낸 강은 고른 숨을 내쉬며 조용히 흘러간다. 상처 많은 강일수록 깊은 침묵 속으로 흐른다.  

   

우리 마음에도 강이 흐른다. 강이 깊을수록 조용히 흘러갈 것이다. 세상살이의 고단함이 깊을수록 굴곡 많은 삶이고 내면의 상처도 깊다. 강물이 제 살 갉아 속을 넓히듯 시련은 마음을 갉아 넓힌다. 깊은 강이 쉬 범람하지 않듯, 속 깊은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견뎌낸다. 자신을 앞가림하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       


내 마음의 강은 얼마나 깊을까. 속 깊이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상처에 예민하고, 불만이 솟구칠 때가 있다. 쉬 흥분해서 마음을 삭일 여가도 없이 그대로 토해내기도 한다. 그럴수록 더 자신을 다잡고 다독이며 마음의 강을 넓힌다. 그동안 강은 깊어 지고 넓어졌지만, 아직 깨달음까지는 한참이나 멀었다.


아무 고민 없이 사는 건 쉽지 않다. 누구나 고만고만한 걱정을 안고 산다. 살다 보면 왜 우울할 때가 없을까? 누구나 다 우울함을 겪는다. 어떤 사람은 쉽게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혼자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우울하면 참 힘들다. 단순히 마음을 강하게 먹는 주문을 왼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럴 때 누군가의 글이 도움이 된다. 내 글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이, 그때도 지금도 나는 나다.

몇 년 전 외가 동네를 찾았다. 내 첫 글인 '그 여름의 삽화'가 그려진 곳이다. 신작로도 개울도 작아도 너무 작다. 아랫실못도 그때는 무척 컸는데 지금은 작은 못이다. 이산 저산도 그대로인데 골짜기가 얕아졌다. 그곳은 그대로인데 내가 훌쩍 큰 탓이다. 복스럽든 초가지붕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아스팔트가 깔려 오가기에는 한결 편하지만, 마을은 여전히 오지로 남았다. 


외가는 오래전에 없어졌다. 집터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알만한 사람은 대부분 떠나고, 추억을 되새김질할 친구가 없다. 어쩌면 누군가는 아직 그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시로 나온 후 한 번도 외가 마을을 찾은 적이 없다. 그래서 그를 몰라 볼 수도 있다. 어머니가 도시로 떠나면서 외가도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이미 그 옛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 돼버렸다.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도 지금도 나는 나일 뿐이다. 모두 허상이고 본질은 없다. 찰나에 경험한 것이고 이내 사라질 것들이다. 여전히 깨달음은 모자라고 현상에만 집착한다. 당장 보고 느끼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그래서 욕심이 생기고 욕망이 생긴다. 아는 것은 많은데 실천은 어렵다. 나의 앎도 잠깐 내 머릿속에 머물렀다 사라질 허상인데 아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어린 시절에는 욕심이 없고 세상의 탁함을 몰랐다. 그래서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생각이 복잡해졌다. 의무감, 책무감, 욕심 등으로 마음이 요동을 쳤다.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혼란스러웠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바닥을 쳤다. 비워야 할 마음이 온갖 욕망으로 채워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은 충격에 쉽게 무너졌다. 영혼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파란과 곡절의 세월이었다. 그러다 서서히 마음의 제자리를 잡고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깨달음이 미숙하니 욕망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더 큰 시련이 닥쳤다. 다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욕심을 내려놓고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나를 다독였다. 부귀와 영화가 나와 연이 닿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삶은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는 밀알이다. 밀알이 땅에서 썩지 않는다면 새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다. 밀알의 자기희생이 없다면 새싹도 없고 꽃도 없다. 당연히 열매도 없고 수확도 없다. 밀알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썩어 싹을 틔우는 것이다.      


아득한 깨달음의 길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점차 욕심이 가라앉는다. 현재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내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성실하게 책임을 다할 것이라 다짐했다. 마음의 변화는 뇌 신경회로에서 변화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시냅스의 강을 건너는 행복의 물질이 제자리를 잡았다. 내 마음은 나의 뇌다. 뇌가 작은 것에 만족하면 마음은 평안해진다. 뇌 신경회로가 변해야 하고, 행복의 물질이 넘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실질적인 첫걸음이다. 몸이 마음을 만들고, 마음은 몸을 단단하게 한다. 


억겁의 세월에 비춰보면 삶이란 바닷가 모래알에 불과하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허상이다. 수백 혹은 수천 년 지나면 우리가 살았던 이 시대도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현상인 색은 결국 사라지고 공만 남을 것이다. 찰나의 삶에서 더 가지려고 아귀다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하고 방관하라는 말은 아니다. 욕심을 줄이고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그럴 것을 왜 이리 먼 길을 돌아왔을까. 깨달음이란 그런 것이다. 경험하고 깨지고 해야 겨우 알아듣는다. 예수나 붓다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다. 세상의 작은 이치 하나를 깨닫기 위해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물며 우매한 나로서야 감히 범접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노력은 해봐야지. 이승에서 안 되면 다음 생에서라도 깨치리라는 희망으로.      


내 마음의 유장한 강물은 그 여름의 삽화를 싣고 떠난다. 이제 그 여름의 추억과 작별할 때다. 그리고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위한 공부에 정진할 것이다. 상처 많은 강은 소리 내지 않는다. 흐름도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듯이 글도 소리없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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