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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Dec 19. 2022

사라진 모나리자, 획득의 기쁨보다 손실의 고통

 어느 날 아침, 사라진 「모나리자」  

모나리자(1503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앗 모나리자가 어디로 간 거야?” 화가 루이 베루드가 소리쳤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모나리자를 그리려고 왔는데 정작 그림이 없는 게 아닌가? 그는 황당해서 경비에게 물었다.    

 

 “관장이 사진 찍으러 가져갔겠죠” 박물관 경비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1911년 8월 22일(화)에 있었던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시작이다. 그 당시 루브르 박물관장은 사진기에 빠져 있었다. 그는 종종 루브르의 그림을 사진 찍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져갔다가 다시 원래 자리에 걸어놓곤 했다. 경비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루브르가 발칵 뒤집혔다.     

     

“음 아무도 없으니 지금부터 설설 작업해볼까.” 반첸초 페루자는 루브르의 창고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아무도 없는 박물관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목수로 한때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월요일이 루브르가 휴관한다는 사실을 알고 아무 거리낌 없이 살롱 카페의 「모나리자」 앞에 섰다. 그는 벽에서 그림을 떼어내 옷 안에 쑤셔 넣고 유유히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당시만 해도 루브르의 「모나리자」 대우는 신통치 않았다. 월요일 이른 마침 페루자가 그림을 갖고 나갔다는 사실을 다음날 알아차릴 정도로 관심이 적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사람은 물론이고 세계인은 「모나리자」를 그리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루브르의 많은 작품 중 하나로만 알고 있었다.      

     

프랑스의 모든 언론은 호떡집에 불난 듯 난리가 났다. 언론은 루브르의 관리 소홀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프랑스의 모든 언론은 모나리자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와 「모나리자」를 소개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당시에는 신문을 가정으로 배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독자들이 가판점에서 신문을 사야 했다. 신문사들은 최고의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야 신문이 잘 팔리는 시절이다. 그러니 잃어버린 「모나리자」 이야기는 신문이 판매 부수를 올리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소재였다. 사람들은 「모나리자」 이야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할 정도로 기사가 넘쳐났다.     

      

이제 「모나리자」는 루브르의 많은 작품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대표 그림으로 부상했다. 프랑스는 반드시 「모나리자」를 찾아야 하고 제자리에 되돌려 놓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다. 경찰은 그림 도둑 검거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오죽했으면 파리 문화와 예술계의 최고 스타였던 시인 아폴리네르와 화가 피카소도 의심받는 지경이었다.     

     

“대체 어떤 그림이길래?”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봐 둘걸” 후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나왔다. "아쉽지만 「모나리자」가 걸렸던 자리라도 보러 가자”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루브르로 달려갔다.     

     

있을 때보다 사라지고 난 후 아쉬움이 더 크다는 심리가 작용했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은 전 세계인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았다. 2년이 조금 더 지나자 사람들의 관심도 첨자 식어갔다. 그때 범인인 반첸초 페루자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10만 달러에 「모나리자」를 팔려다가 범행이 탄로 났다. 그는 세계적 주목의 대상이 그림을 도둑에게 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몰랐다.     

     

“나는 이탈리아를 위해 그림을 훔쳤다. 왜 이탈리아 사람이 그린 그림이 남의 나라 프랑스에 있는가? 나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하고 반체초 페루자가 말했다.      

     

사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직접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돈을 주고 판 그림이다. 따라서 「모나리자」를 약탈한 것이 아니기에 반체초 페루자의 주장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범죄 행위를 애국주의에 호소한 얄팍한 계산이었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억지 주장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의 말이 인용되는 걸 보면 나름 성공한 작전이다.      

     

획득의 만족과 손실의 고통      

“모나리자를 보러 왔어요. 어디로 가면 되죠?”하고 관광객이 묻는다.     

     

코로나로 인해 관광객이 줄어들기 전 매년 8,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루브르를 찾았다. 그들은 빠짐없이 「모나리자」로 가는 길을 묻는다. 박물관은 아예 군데군데 「모나리자」로 가는 안내판을 준비할 정도로 사람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이처럼 식을 줄 모르는 「모나리자」의 인기가 사실은 도둑 맞은 경험 덕분이라 생각하면 무척 역설적이다. 사람은 보유했던 물건을 잃어버리고 나면 더 큰 아쉬움을 느낀다. 그래서 더욱 그것을 그리워하게 되고, 나중에 찾게 되면 기쁨이 배가되는 것이다. 반체초 페루자 덕분에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더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있다.      


인간의 심리는 같은 물건이나 같은 액수의 돈을 얻을 때와 잃어버렸을 때의 만족감과 손실의 크기 차이에서도 발견된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새로 얻을 때의 만족감보다 갖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의 고통을 크게 느낀다. 손실의 고통이 이득의 기쁨도다 더 크다는 뜻이다. 가지고 있었을 때는 정이 들거나 안도감을 가지는 보유효과도 덤으로 얹히기 때문이다. ‘있을 때는 몰랐는데 사라지고 나니 빈자리가 크게 다가온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획득 만족과 손실 고통


인간은 예술품의 획득과 손실에서도 심리적 만족감과 고통을 겪는다. 그 크기를 돈으로 정확하게 환산하는기는 어렵다. 만족과 고통은 마음의 느낌이고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크기를 계산할 수 없다 고 해도 대략의 크기는 비교할 수 있다. 위의 그림에서 같은 100만 원을 획득할 때의 만족감과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렸을 때 고통의 크기를 비교했다. 이 비교를 미술품으로 확대한다면 획득과 손실의 심리적 크기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모나리자」를 도둑맞고 난 후 사람들이 경험한 손실의 고통이 무척 컸다. 예술 작품은 하나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잃어버리면 더 구할 수가 없어 손실의 고통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쉬움에 경쟁적으로 그림의 빈자리를 보러 루브르를 들렀다. 그때는 유럽의 강대국들이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정복하는 제국의 시대였고 충돌의 시대였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팽배한 시절이라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미소에서 위안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잃어버린 아픔도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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