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도 좋지만,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도 좋다.
몇 권의 책을 읽고 제법 그림을 아는 체했다. 전시회를 다니다가 눈에 익은 작품이 나오면 잘난 척하는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처럼 굴었다. 그래봤자 책에 나오는 내용을 주워섬기는 정도였다. 책을 쓴 이가 분석한 것을 그대로 읊조리는 것을 마치 그림을 아는 양 떠들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낯 뜨거운 노릇이다. 코넬 대학교 사회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더닝(David Dunning)과 대학원생 저스틴 크루거(Justin Kruger)가 말한 것처럼 쥐뿔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 자기가 많이 안다고 착각하는 더닝-크루거 효과가 발동했다.
화가의 자란 환경이나 습작 시절 이야기는 누가 해도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책을 보든 다 거기서 거기까지다. 그렇지만 작품은 보는 것은 남이 설명한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남의 눈을 통해 그림을 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예 모르고 그림 앞에서 폼 잡는 것보다 그것만 해도 어디냐고 할 수 있지만, 그건 동공에 그림을 비추는 것이지 제대로 본 것이 아니다. 제대로 그림을 본다면 작품 그 자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물감의 두께, 구도, 묘사, 붓질의 정도, 깊이감 등등 셀 수 없는 감상 포인트를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했지만, 때로는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행하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그림은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도 좋지만,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도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림을 그려보면 그림을 더 잘 이해할 수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시작하면 언젠가는 제법 그럴듯하게 그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작동했다. 제대로 된 취미 생활 하나쯤 가져야 하니, 이왕이면 그림을 그리면 되겠다. 미학의 세계로 빠져들면 근사할 거라는 순진한 낭만주의자로 변신했다.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결같이 치열한 습작 시대를 거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피카소, 고흐, 세잔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 화가들도 당연히 스케치와 소묘의 시간을 지나면서 기초를 다졌다. 지금도 자신의 작업실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는 많은 작가가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인다. 감히 이들을 들먹이는 일조차 민망하고 겸연쩍다. 그렇지만 이들을 통해 기초 공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음을 깨닫는다.
하물며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기초부터 배워야 한다. 어디 가면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울 수 있는지 알아봤다. 인터넷을 뒤지면서 몇 개 학원을 조사했다. 그리고 일일이 발품을 팔아 그곳을 방문하고 원장님과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미술학원이 입시생 위주로 운영된다. 생각보다 성인들이 배울 곳이 마땅찮다. 한두 군데 제법 그럴싸한 곳도 있지만 거리가 멀어서 힘들다.
화실 찾아 삼만리
생각보다 그림 배우는 일이 쉽지 않다. 홈플러스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곳에 가면 2개월 혹은 3개월의 짧은 시간 동안 인물화나 풍경화를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교육비도 저렴하고 해서 취미로 그리고자 하는 사람이 많이 배운다. 짧은 기간 안에 성과를 보여야 하다 보니 내가 생각하는 그림 공부와는 맞지 않았다. 아쉽지만 몇 번 다녀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도시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렇다고 내 생활 반경에서 너무 떨어지는 곳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열심히 구글링하고 네이버 지식인의 힘을 빌렸다. 그때 마침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화실을 발견했다. 지하철역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 앞에 있는 화실이다. 이곳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인가 보다. 그런 짐작으로 전화를 걸어 선생님과 방문 약속을 잡았다.
약간의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으로 화실 문을 열었다. 그림의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다. 저녁 7시를 갓 넘은 시간이라 두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혼자서 몰입해야 하는 작업이라 누가 와도 알은체를 잘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건 모든 것이 생소한 나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이젤, 물감, 물통, 작업 중인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간간이 선생님의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보는 화실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아마 책으로 화가들의 화실을 자주 본 탓일 것이라 짐작한다.
그전에 알아보러 다닌 화실은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 주눅이 들었다. 그곳과는 달리 이곳은 참 편안한 분위기다. 주말에 초등학생들이 많이 오고, 주중에는 어른들이 주로 그림을 그린다. 처음 방문한 날은 마침 평일이라 조용한 분위기라 기분까지 차분해진다. 빼곡한 붓, 물감과 팔레트,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유화물감들이 널브러져 있다. 화실에는 한창 작업 중인 그림들이 펼쳐져 있는 분위기가 너무 자연스러워 좋았다.
선생님은 무척 차분하다. 조용조용하게 말한다. 앞으로 어떻게 배울 것인지를 설명한다. 다른 몇 군데 미술학원 선생님의 빠른 말투와 달라 말투가 조용해 듣기 편하다. 참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주일 두 번씩 하루 세 시간 지도를 받는다. 평일에는 저녁 7시부터이고 토요일은 오전 11시부터 세 시간씩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시간과 거리도 적당하고 게다가 교육비도 마음에 들었다.
날짜를 맞추고 필요한 도구가 무엇인지 설명을 듣는다. 선생님이 추천한 화방넷에서 필요한 것들을 주문했다. 잘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미술 시간을 끝으로 붓이라곤 잡아 본 적 기억이 없다. 완전히 초보자인 내가 그림을 배운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시작한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그림은 그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우는 데 몰입하자는 굳은 결심을 안고 화실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