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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Oct 24. 2022

검은 개와 함께한 청색 시절

내 머릿속의 검은 개


피봇 테리어 https://boridesigner.tumblr.com/post/681706497451900928?is_related_post=1 을 아이패드 드로잉



대학원에 진학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늘 제일 앞자리에 앉는 모범을 보였다. 그게 난청을 숨기기 위한 수단도 됐다. 마음은 늘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불안한 영혼의 안정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긴장된 나날이다. 그때 유리 같은 멘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마음은 우울의 심연으로 수직 낙하했다.

    

”탕~~!!“하고 총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침묵 속에서 눈을 번득이며 노려보던 ‘검은 개’가 튀어나왔다. 상심한 일이 방아쇠가 되어 ‘검은 개’를 깨우는 것이다. 검은 개는 세로토닌 분비 장치뿐만 아니라 도파민 분비 장치까지 물어뜯었다. 의욕과 운동 능력을 관리하는 도파민 고갈은 온몸의 힘을 앗아갔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조차 없고, 몸을 뒤척일 기운조차 남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의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검은 개는 난폭 했다. 내 영혼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검은 개가 머릿속을 온통 휘젓고 다녔다.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밤새 으르렁댄다. 심술이 나면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내 영혼은 이내 너덜너덜해졌다. 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자취방에서 혼자 검은 개와 싸우는 시간이 많았다. ‘검은 개’에 포위된 대부분 사람이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나는 반대로 잠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축 처진 채 느릿느릿 마지못해 잠에서 깬다. 기력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모든 일이 어렵다. 온몸이 피곤함에 절었고 무얼 하나 할 의욕도 없다. 세로토닌과 도파민 분비 물질이 확연히 줄었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기가 힘들다. 마음은 있지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어찌할 수 없다. 주위에서 아무리 뭐라 해도 소용이 없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근육을 움직이는 물질이 고갈된 탓이다. 남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움직이지 못한다니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강 계단을 따라 끝없이 바닥으로 

‘검은 개’가 돌진하면 자신이 불행하고 외롭다는 생각에 젖는다. 자칫하면 검은 개한테 끌려 늪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인 앨릭스 코브(Alex Korb)에 따르면, 우울은 소용돌이처럼 늪의 바닥으로 끌고가는 하강 나선으로 작동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통제를 벗어난다. 이는 다시 뇌의 부정적인 변화를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검은 개’는 우리를 선형 계단을 따라 아래로 끌고 내려간다.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면 깁스한다. 아픈 티를 팍팍 내 다른 사람의 대우를 받는다. 그렇지만 우울함은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다. 대개의 우울증도 시냅스의 작동 오류라는 일시적인 인체의 기능 장애다.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병원 가서 처방받고 약을 먹으면 얼마든지 회복한다. 억지로 혼자 쉬쉬하며 버티다가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끝내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정신건강의학이나 심리분석 전문가들은 우울증에 빠진 고통은 세상의 어떤 다른 고통보다 더 참혹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손톱이나 발톱을 뽑는 고문보다 더 괴롭고 힘든 것이 중증 우울이라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처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들이 게으르고 나약해서 그렇다고 책망한다. 툴툴 털고 일어나는 의지를 보여라고 채근한다. 누구는 그렇게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힘이 없어 못 움직일 따름이다.  


UCLA 교수 매튜 D. 리버먼의『사회적 뇌』에서 말하는 사회적 고통을 인용하자. 팔이 부러져서 느끼는 고통과 여자친구에게 버림받아 느끼는 고통은 다르다. 그렇지만 사회적 고통의 기억이 신체적 고통의 기억보다 훨씬 더 강렬한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적 고통도 신체적 고통만큼이나 실제 고통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우울함이 주는 고통은 신체적 고통보다 훨씬 더 강하다. 


우울함에 빠진 것은 깊은 우물에 빠진 것과 같다. 사방이 벽이고 아무도 없는 깊은 우물 바닥에서 혼자 고통스러워한다. 우물의 벽을 기어오를 힘이 없다. 시간이 지나 이대로 눈을 감으면 어떨까 하는 끔찍한 상상을 한다.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발버둥을 친다. 줄을 잡고 올라오면 어두운 우물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이때 누군가가 동아줄을 내려줘야 한다. 곁에 있는 누군가가 다독여 주고, 전문가와 만나는 일을 도와야 한다. 


깊은 우울함에 빠진 사람이 자기 발로 병원을 찾는 일은 정말 힘들다. 집 근처도 아니고 먼 곳에 있는 병원에 가야 한다면 온몸의 힘을 쥐어짜야 한다. 이들에게는 밥을 먹는 일이나 자신의 침대에서 내려오는 일조차 엄청 많은 에너지와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이들이 병원에 가는 것은 깊은 우물의 담을 기어오르는 것과 같다. 처절한 노력이 필요하다.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물에 빠진 사람을 위한 광명의 동아줄이다. 


상처와 영광의 20

나의 20대는 어정쩡하게 시작됐다. 어른은 아닌데 어른이 돼야 했다. 미래가 불안한 젊음은 허무했고,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열정은 공허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방황했고,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와 같았다. 


20대 시절 처음 나타난 ‘검은 개’를 달랠 때는 전적으로 몸으로 때웠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시간이 계속 흘렀다. 검은 개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흉측한 이빨도 드러내지 않았다. 가끔 사나운 눈초리로 그르렁대며 쳐다봤다. 그것도 차츰 잦아들었다. 그렇게 머릿속의 검은 개와 2년 가까이 동거했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검은 개가 사라지도록 했다. 


‘잘 견뎠구나’라고 위안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2년 동안 내 머릿속을 ‘검은 개’와 슬기롭게 동거했다. 오직 인내하고 시간과 싸움을 벌였다. '검은 개'에게 물어뜯기고 피 흘리면서도 견뎠다. 강해서 이겨낸 것이 아니라 끝까지 버텨 강함을 증명했다. 검은 개와 함께하는 나름의 원칙을 정했고, 그것이 큰 힘이 됐다. 


나의 20대는 상처와 영광이 함께 했다. 초반과 중반에는 철저히 상실했고 우울했다. 검은 개가 물러간 후반에는 영광이 찾아왔다. 박사과정 시험에 합격했고, 전체 수석이라 전면 장학금도 탔다. 박사 학위 과정 시험에도 수석을 뽑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에는 경쟁률이 꽤 높은 터라 합격하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때다. 운이 좋았다. 후에 장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학비 걱정 없이 장학금으로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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