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권하는 사회

by Henry

살림살이는 나아졌지만

그 옛날 농촌이나 공동체 사회에서 보이던 유대감과 끈끈함이 있었다. 이웃집 아이를 맡아주고 돌봐주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었다. 일 있을 때면 안심하고 아이를 이웃집에 맡겼다. 자기 아이나 이웃집 아이나 차별하지 않고 돌봐주는 든든한 이웃이 있었다. 그때는 아이가 받는 유아기의 고통이 지금보다 훨씬 덜했다.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고 더 튼튼했다.


그 시절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다. 친구도 가난했고, 이웃도 가난했다. 참 신기하다. 그때는 서로 위해주고, 서로 도우며 살았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정을 함께했다. 배는 고팠지만, 정신은 덜 허기졌다. 위로해 줄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세상을 덜 각박하게 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정신적 고통을 받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가난을 극복하고 훌륭한 인품을 갖춘 성인으로 성장한다.


대한민국은 참 대단하고 놀라운 나라다. 인류 역사에서 드물게 식민지국의 어려움을 스스로 개척했다. 원조받는 신세에서 원조하는 지위로 격상했고, 짧은 시간에 세계적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수천 년 이어온 배고픔을 해결한 것도 놀라운 일이다. 지독했던 가난한 아득한 추억이 된 지 오래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먹고사는 건 일도 아니다. 가난과 배고픔이 주는 정신적 황폐함은 이제 사라졌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답하기 힘들다. 분명히 삶은 윤택하고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났다. 살림살이는 나아졌지만, 더 외롭고 쓸쓸해졌다. 이웃이 누군지 알지 못하고, 그들과 살갑게 말을 나눠본 적도 없다. 벗하고 마음 나눌 이웃도 없다. 그저 각자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 우리를 짓누른다. 그건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라 한다면,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병리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과도한 경쟁이 만든 피로사회

독일 출신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공동체 사회가 해체되고, 개인이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것이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급속한 산업화는 공동체를 해체하고, 개인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공동체의 원초적 유대와 방어막이 사라지자, 개인은 고독과 불안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개인은 회사나 단체의 일원이 되어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한다.


자본은 스스로 몸집을 불리는 폭식성을 띤다. 자본은 피도, 눈물도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강하고 잔인하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은 야수의 모습을 한 것이 자본이다. 맹독성의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야수다. 자본이 없는 사람은 자칫하면 그의 날카로운 이빨에 처절하게 짓이겨진다. 잔인하고 냉정한 자본의 힘 아래서 살아남으려면 자본의 품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유의지는 사라지고 복종만 남는다. 그런 상태에서 정신적 여유를 찾을 수 없다.


현대인은 회사나 직장에서 사람들은 성과를 요구하는 압력에 시달린다. 그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한국인 출신의 독일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항상 피로에 젖어 살고 있다. 사람들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며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에 빠져든다. 현병철의 말을 빌리면, 현대의 중요 질병은 우울증이고 이것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한병철은 폭력적인 피로와 과도한 성과주의는 영혼을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은 회사나 조직이 요구하는 성과를 올려야 살아남는다. 성과에만 집착하다가 보면, 생각과 사색의 기회마저 뺏긴다. 잠시 쉬고 생각할 여유를 가져야 인간의 정신은 견뎌낸다. 이런 시간조차 갖지 못하고 오로지 성과를 위해 내달리기만 하면 영혼은 서서히 죽어간다.


피로사회에서 마음 둘 곳 없는 현대인은 최근 인터넷과 모바일 네트워크가 마련한 익명의 공간으로 빨려들었다. 우울하고 고립감을 느끼는 개인들은 익명성의 보호막 아래서 위로와 위안을 구한다. 그들은 여론이라는 이름의 권위에 휘둘리며 맹목적인 추종자로 살아간다. 개인들은 쟁취한 정치적 자유마저 포기하고 집단성의 광폭함에 몸을 내맡긴다. 자유가 두려워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 하는 그 순간 영혼이 황폐하고 정신은 심각한 어지럼증에 시달린다.


중독 권하는 사회

뭉크 절규.JPG 《절규(1893)》에드바르 뭉크


그래서일까. 예전에는 보도 듣지도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끔찍하고 엽기적인 사건이 하루가 멀다고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는 참혹한 사건을 들으면서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부모의 재산을 둘러싼 가족의 갈등이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하는 사건도 많다. 무엇보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을 보내지 못하고 결국 살인하는 일을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문제는 이런 일이 더 자주, 더 끔찍하게 일어나는 데 있다.


왜 그럴까? 현대인의 정신 건강이 옛날보다 좋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는 성장했고, 물질적 풍요는 좋아졌다. 그 대가로 세상은 피로해졌고, 소외 현상이 만연해졌다. 높은 경쟁 압력과 성과 달성에 휘둘리다 보면, 영혼은 황폐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단절되고 개인화되고 고립되었다. 이제 이웃이 누군지 관심도 없고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두뇌가 여물지 않은 아이들은 자라면서 정신적 스트레스에 더 많이 노출되고, 뇌 신경 회로가 이상을 일으킬 가능성도 커졌다.


퇴로 없는 경쟁과 승자가 독식하는 사회는 피곤하다. 마음 둘 곳 없는 현대인은 늘 피로에 찌든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정신을 놓치기가 십상이다. 예전에는 마약이나 야물 중독에 빠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때 대한민국은 마약으로부터 안전한 청정국이었다. 언제부턴가 중독 현상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화려한 스타에서 일반인까지 마약과 약물 중독에 빠졌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만난다. 배신당하고, 사기도 당하고, 경제적으로 파산하기도 한다.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고 모두 중독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강한 의지로 버텨내고 어려움을 극복한다. 시련과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중독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중독 현상이 널리 퍼지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가 중독을 권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또 어떤 중독이라 해도, 중독에 빠지는 것은 분명히 개인의 책임이다. 그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렇지만, 사회가 중독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면, 중독에 빠질 위험 소지가 있는 사람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정신 상태가 더 황폐해지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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